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회(汝會).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훈련대장 겸 좌포도대장을 지냈고,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한성부판윤·형조판서·강화부유수·어영대장·공조판서를 지냈다.
그해 대원군이 천주교도를 탄압할 때 포도대장으로서 교도들을 수없이 학살하였는데, 죄인들을 낙동(駱洞)의 자기 집에서 심문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경하를 염라대왕처럼 무서워하여 ‘낙동염라’라는 별칭도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하고 한강을 봉쇄하자 순무사(巡撫使)로 발탁되어 도성방비의 책임자로 출진하였다. 1882년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재직중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어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나, 대원군의 깊은 신임으로 1884년 풀려나와 좌포도대장을 지냈다.
그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에는 조대비·민비·세자(순종) 등을 아들 이범진(李範晉)의 집에 피난시키기도 하였다. 주로 군사·경찰의 요직을 맡아 치안을 담당하였다. 시호는 양숙(襄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