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팔(舜八). 서울 출신. 흥완군 이정응(李晸應)의 아들로 흥녕군 이창응(李昌應)에게 입양되었으며, 고종의 종형이다.
1853년(철종 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응교·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863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1864년(고종 1) 대원군이 집권하자 중용되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도승지·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홍문관부제학·규장각직제학을 역임하고, 1865년 8월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예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1866년 한성부판윤이 되고, 다시 이조판서·공조판서·의정부우찬성을 역임하였다.
1867년 예조판서에 임용되고, 1868년 경복궁중건 때에는 종정경(宗正卿)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겸임하였다. 그뒤 수원부유수를 거쳐 1871년 이조판서·판의금부사·병조판서·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1876년 평안도관찰사, 이어 경기도관찰사·광주부유수·강화부유수에 임명되었다.
1881년 통리기무아문의 개편에 따라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에 임명, 교련국(敎鍊局)에 배치되어 근대식 군부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1882년 이조판서를 거쳐 1884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의하여 영의정에 추대되고, 정변 실패 후에도 이조판서로 등용되었다.
1885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1887년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불응하여 한때 평택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판돈녕부사에 제수되었다. 1888년 이조판서·한성부판윤, 1890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1891년 종정경을 지냈다. 1899년 완림군(完林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관직생활 일기로 입조록(立朝錄)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