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복경(復卿). 민치구(閔致久)의 아들로, 민치록(閔致祿)에게 입양되었으며,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오빠이다.
1864년(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에 임명되고, 이듬해 응교·전한을 거쳐, 규장각직각이 되었다.
1866년 여동생이 왕비로 책봉되자 중용되어 그해 8월 이조참의,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72년 형조판서가 되고, 1873년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무렵 서계(書契) 문제로 일본 메이지정부[明治政府]의 국교요청이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국서수리거부정책으로 나타나자, 이에 반대하여 ‘국서를 거절함으로써 일본의 분노를 사게 된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음은 물론이요, 양국이 상호 제휴하여 문명개화할 수도 있을 것’임을 통찰한 나머지 이 뜻을 내주(內奏)하고,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과 모의한 다음 박정양(朴定陽)을 부산에 파견하여, 당시의 형세를 관찰하게 하였다.
1873년 이후 민씨족당의 수령으로서 민비의 배후인물로 암약하여, 흥선대원군 축출공작을 폈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국정전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874년 폭탄이 장치된 우송 소포의 폭발로 일가와 함께 폭사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