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고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의 정자(正字) · 대교(待敎) · 직각(直閣) 등을 역임하였다. 민영익(閔泳翊)과도 가깝게 지냈으며, 1881년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조사(朝士)로 선발되어 주로 일본 육군을 시찰,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와 『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을 작성하였다.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가 되었으며, 민영익과 함께 총무국을 담당하였다. 1882년 홍문관부제학과 규장각직제학에 임명되었고, 부호군이 되어 임오군란의 수습에도 활약하였다. 이어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 ·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역임하고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1883년 6월에는 그 전해에 체결된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에 따른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 전권부대신으로 미국을 다녀와 11월에 그 결과를 보고하였다. 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부터 개화당(開化黨)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1884년에는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고,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그 해 3월 27일에는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겸임하여 우정국을 세우는 데 전력하였다.
10월 17일, 그는 김옥균 · 박영효 등과 우정국의 개국 축하잔치가 벌어지는 틈을 이용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과 일본 세력의 모의로 일어난 갑신정변은, 일본 세력에 의지해 친청온건개화파(親淸穩健開化派), 즉 사대당(事大黨)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큰 사건이었다.
정변 후 홍영식은 신정부의 좌우영사 겸 우포장(左右營使兼右捕將)에 제수되었다가, 곧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만에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지도층 대부분이 일본에 망명한 것과는 달리,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국왕을 호위하다 청군에게 살해되었다. 아버지 홍순목도 이 사건으로 인해 자살하였다.
그는 문벌도 좋았고 성품도 온후하여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원되었으며,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대제학(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奎章閣大提學)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