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례로 외국에 파견하는 사절단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1883년에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을 의미한다.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3년(고종 21) 4월, 푸트(Foote, L. H.) 공사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고종은 이에 대한 답례와 양국 간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의례적 목적 외에 보빙사 파견의 실질적 목적은 근대화 정책 추진에서 미국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강화되자 미국으로부터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공인받으려 하였다. 또한 조선 정부의 외교, 교육 등의 분야에 미국인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초빙하려 하였다.
보빙사의 구성원은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대신 홍영식(洪英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수행원 유길준(兪吉濬) · 고영철(高永喆) · 변수(邊燧) · 현흥택(玄興澤) · 최경석(崔景錫) 등과 통역을 맡은 중국인 우리탕[吳禮堂], 참찬관 미국인 로웰(Lowell, P.) 등 모두 10인이었다. 로웰은 빙햄(John A. Bingham) 주일미국공사가 일본에서 천거한 인물로 일행의 안내를 맡았다. 이 밖에 로웰이 개인 통역 비서로 채용한 일본인 미야오카 쓰네지로[宮岡恒次郎]도 비공식 수행원으로 동행하였다.
1883년(고종 21) 6월 11일(양력 7월 14일), 사폐(辭陛)한 사절단은 6월 13일(양력 7월 16일)에 인천을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8월 2일(양력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40여 일 동안 미국에 체류하였다. 8월 18일(양력 9월 18일)에는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아서(Chester A. Arthur)를 접견하고 국서와 신임장을 제출하였다. 그 뒤 보스톤에서 외국박람회 · 시범농장 · 방직공장 · 공립학교 등을 시찰하고, 뉴욕에서 병원 · 전신회사 · 보험회사 · 신문사 · 우체국 · 육군사관학교 등을 시찰하였다. 워싱턴에서는 국무부 · 농무부 등 중앙부처를 시찰하고, 9월 12일(양력 10월 12일)에 백악관을 방문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고별인사를 전하였다.
공식 일정을 마친 보빙사 일행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귀국하였다. 홍영식 전권부대신은 로웰 · 우리탕 · 현흥택 · 최경석 · 고영철 · 미야오카를 대동하고 태평양 항로로 귀국하여 1883년(고종 21) 11월 21일에 복명하였다. 민영익 전권대신은 해군무관 포크(George C. Foulk),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를 대동하고 미국 정부가 주선한 군함 트렌턴(Trenton)호를 타고 유럽을 시찰하였다.
이들은 6개월 동안 세계일주를 마친 후 1884년(고종 22) 5월 9일에 복명하였다. 귀국 후 민영익은 미국 공사관을 방문하여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서 광명세계로 들어갔다가 이제 또다시 암흑세계로 되돌아왔다. 나는 아직 내 진로를 분명히 취할 수 없는데, 곧 앞으로의 나의 거취를 밝히게 될 것을 희망한다”고 소감을 피력하였다.
세계일주는 민영익에게 미국과 서양 문물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심어주는 데는 성공하였을지라도 기대한 대로 그를 진보적인 지도자로 변모시키지는 못하였다. 민영익과 홍영식은 정치노선을 달리하여 갑신정변 때 서로 정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