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

민영익
민영익
근대사 /회화
인물
대한제국기 「묵란」, 「노근묵란」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정치인.
이칭
우홍(遇鴻), 자상(子相)
운미(芸楣), 천심죽재(千尋竹齋)
이칭
죽미(竹楣), 원정(園丁), 난부고흥, 동해난부생, 죽동농, 난애(蘭涯), 동해난개(東海蘭匃), 난부우난(蘭阜友蘭), 난부농(蘭阜農), 죽빈(竹賓), 죽창(竹蒼)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0년(철종 11)
사망 연도
1914년
본관
여흥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대한제국기 「묵란」, 「노근묵란」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정치인.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우홍(遇鴻), 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 원정(園丁), 천심죽재(千尋竹齋) 등이 있다. 아버지는 민태호(閔台鎬),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5년(고종 12)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와 그의 아들이 죽은 뒤 양자로 입양되어,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로 이른바 ‘죽동궁(竹洞宮) 주인’이 되었다. 187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개화당 인사들이 민영익의 사랑에 자주 출입하였다.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軍務司堂上), 별기군(別技軍)의 교련소당상으로, 1882년 7월 임오군란 이전까지 윤웅렬(尹雄烈) 등과 별기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였다.

신식군대와 구식군대 사이의 갈등과 마찰로 인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민씨척족세력의 거물로 몰려 가옥이 파괴당하였다. 그리고 군란 진압 후 박영효(朴泳孝)를 정사로 하는 사죄사절이 일본으로 파견될 때,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비공식 사절로 3개월간 일본의 개화 진행 상황을 시찰하였다. 이어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權知協辦交涉通商事務)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이 1882년 외아문과 내아문으로 개편될 때, 김옥균과 같이 부교사협판(富敎司協辦)이 되었다.

1883년 5월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 L. H.)가 내한하자, 그 해 6월 이에 대한 친선사절 보빙사(報聘使)의 정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미국 대통령 아서(Arthur, C. A.)를 두 차례 만나 한글로 작성된 국서를 주며,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어 세계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 의약제조회사, 해군연병장, 병원, 전기회사, 철도회사,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였다. 특히 워싱턴에서 내무성 교육국 국장 이턴(Eaton, J.)을 방문하여 미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소개받았다. 그리고 교육국사(敎育局史)와 연보를 기증 받았다. 그 밖에 우편제도, 전기시설, 농업기술에 관심을 보였는데, 뒤에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育英公院),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 등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뒤에 주한 미국 공사 푸트를 통해 육영공원 교사 선발을 국장 이턴에게 의뢰하여,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생 헐버트(Hulbert, H. B.), 번커(Bunker, D. A.), 길모어(Gilmore, G. W.)의 3명이 파한되었다. 또한 볼티모어시에서 가우처(Goucher)여자대학 학장인 가우처를 만나 뉴욕 감리교 선교부에 조선에 대한 선교 기금을 희사할 것을 요청하여 선교사 파견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The Smithsonian Institution)에 조선 약용 식물의 표본을 기증하여 최초의 문화 교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타작기, 벼베기기계, 저울 등 농기구 18품을 구입하여 귀국하였다. 당시 부사는 홍영식(洪英植), 서기관은 서광범(徐光範), 수행원은 변수(邊樹 혹은 邊燧), 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사들이었다. 1884년 5월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그 뒤 혜상공국총판(惠商公局摠辦), 이조참의, 금위대장,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84년 10월 친군영(親軍營) 실시 뒤 우영사(右營使)로 있으면서 개화파를 압박하였다. 그런데 그 해 12월 개화당의 김옥균 등이 주도한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전신에 자상(刺傷)을 입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Allen, H. N.)의 치료를 받아 3개월 만에 친군영에 복직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파견하였다.

1885년 초 임오군란 후 청나라에 납치, 유폐된 흥선대원군의 회국 의사를 표명해 온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대원군의 귀국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톈진에 가서 대원군의 회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뒤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서 지리국(地理局), 군무국(軍務局)의 총판을 겸직하고, 이어 한성부 판윤과 병조 판서를 지냈다.

1886년 정부의 친로거청정책(親露拒淸政策)을 반대하는 한편,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이러한 사실을 밀고하였다가 정치적 위협을 느껴, 1887년 내탕금(內帑金)을 가지고 홍콩과 상해(上海) 등지를 전전하였다. 귀국하여 통위사(統衛使)가 되었고, 1888년 6월 연무공원판리사무(鍊武公院辦理事務)로서, 학교의 운영 담당 위원이 되어 한규설(韓圭卨), 이종건(李鍾健) 등에게 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1889년 5월 관세를 담보로 외무 고문 데니(Denny, O.N.)와 프랑스 은행으로부터 200만 냥의 차관 계약을 맺어, 그 중 130만 냥으로 종래 차관을 청산하고, 나머지 70만 냥으로 정부재정을 재건해 보려고 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어 판의금부사, 1894년 선혜청당상이 되었으나, 그 뒤 고종의 폐위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홍콩, 상해 등지로 망명하였다. 그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예술활동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글씨를 배운 부친 민태호(閔台鎬)와 숙부 민규호(閔奎鎬)의 가학을 이어 15세 무렵 서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1878년 왕실 외척으로 정계에 입문했던 초기에 김정희 제자인 허련(許鍊)을 자택에 머물게 하는 등 서화가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추사파와의 직간접인 인연은 개화파와의 대립으로 상해에 정착했을 때, 민영익이 오창석(吳昌碩), 포화(蒲華), 서친주(徐親周), 고옹(高邕) 등 상해 서화가들과 교유하며 문인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주요 기반이 되었다. 민영익은 1904년 상해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오창석이 1895년 8월 새겨준 ‘천심죽재(千尋竹齋)’라는 인장의 변관에 “운미 선생이 기거하는 곳을 천심죽재라 하였다”라는 구절과 1895년 이후의 작품부터 오창석의 인장이나 포화의 제시가 다수 포함되고 있어 1895년 무렵 천심죽재에 정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민영익은 상해 서화가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며 독자적인 운미란(芸楣蘭)을 완성하였는데, 이는 비수(肥瘦)와 삼전(三轉)이 없는 난엽(蘭葉)이 곧으면서 힘 있게 곡선을 그리다 끝이 뭉툭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화풍은 이하응(李昰應)의 석파란(石坡蘭)과 함께 조선미술전람회를 포함한 근대 한국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1898년과 1909년 민영익을 방문해 상해의 서화가들과 직접 교유한 서병오(徐丙五)가 운미란과 포화의 묵죽화풍을 수용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서동균(徐東均), 김용진(金容鎭), 배효원(裵孝源), 이경배(李慶培) 등이 운미란을 즐겨 그렸으며, 김규진(金圭鎭) 제자인 이병직(李秉直)과 이응노(李應魯)도 일부 영향을 받았다. 또한 민영익은 포화의 영향을 받아 죽엽(竹葉)이 아래로 처지는 수하식(垂下式)의 우죽(雨竹)과 노죽(露竹)을 그렸는데, 이는 노근란(露根蘭)과 함께 망명 생활을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한 것이다. 특히 민영익의 운미란은 근대 한국 화단에서 석파란과 함께 널리 유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까지도 지속되고 있어 현대 사군자의 양식적 연원이나 계보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김규진, 서병오 등 한국 서화가들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오창석, 포화 등 상해 화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양국의 회화 교류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다.

현전 작품에는 「묵란」(1904, 간송미술관)과 「노근묵란(露根墨蘭)」(삼성미술관 리움)이 대표적이며 다수의 사군자가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갑신일록(甲申日錄)』
『매천야록(梅泉野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사화기략(使和紀略)』(박영효)
『음청사(陰晴史)』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박제형)
『호암전집(湖巖全集)』Ⅲ(문일평)
『한국사강좌』Ⅴ-근대편-(이광린, 일조각, 1982)
『한국사』14·16(국사편찬위원회, 1975)
『신조선사』(박은식, 박영사, 1975)
『개화당연구』(이광린, 일조각, 1973)
『한국개화사연구』(이광린, 일조각, 1969)
『일한그리스도교교류사』(오윤태, 신교출판사, 1968)
「운미 민영익의 생애와 회화 연구」(강영주, 『미술사학』19, 2005)
「민영익의 예술과 생애」(김청강, 『월간문화재』8, 1976)
관련 미디어 (4)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