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일재(一齋). 평양 출신으로 성장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평양 감영 소속의 도화서 화원 김기엽(金基燁)에게 그림을 배워산수⋅인물⋅풍속을 잘 그렸다.
1907년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하였고, 1913년 윤영기(尹永基)가 평양에 설립한 기성서화미술회(箕城書畵美術會)에서 노원상(盧元相), 김유탁(金有鐸) 등과 함께 전통 서화를 가르쳤다.
1915년 가을 경복궁에서 식민통치 5년을 기념하는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는데, 이때 그의 작품도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수묵채색의 『하당독서(夏堂讀書)』로 입선하였으나 한국인 심사위원 차별대우에 대한 항의로 제2회부터는 출품하지 않았다.
1922년 『매일신보』에는 5월 16일부터 24일까지 서화 대가 6명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이때 그가 포함된 것으로 보아 근대 초기 화단에서 원로로 화명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기사에 의하면 그의 집을 방문하니 네 벽에 산수와 조선의 고대 풍속도가 진열되어 있었고, 문부성미술전람회 입선으로 작품 1점당 수백 원씩 받았다고 한다.
1923년 10월 개인전을 열었으며, 1925년 6월 일본 유학을 마친 김관호(金觀鎬), 김찬영(金讚永)과 함께 평양에 결성한 삭성회(朔星會)를 통해 화단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1925년 7월 1일 부설된 삭성회 회화연구소에서 김광식(金廣植)과 함께 전통회화를 가르쳤다. 또한 1930년대 초까지 매년 개최된 삭성회전에 출품하여 근대적 미술품 소통방식을 보급하는 등 평양 화단의 발전에 기여하다 1938년 2월 20일 평양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현전작품에는 「산수도」(서울역사박물관), 「쌍마인물도」와 「설중방우도」(고려대학교 박물관), 범죄인을 추국․문초․처형․면회 등의 48장면을 그린 풍속화첩 『형정도첩(刑政圖帖)』와 「평생도」(개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