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생. 호는 동우(東愚).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였다. 1911년 9월에는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양화과(洋畵科)에 입학하였고, 1916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고희동(高羲東)에 이어 두 번째의 양화가로서 우리나라 유화 도입기의 선구자이다.
그의 재능은 일본 도쿄미술학교 재학시절인 1915년 8월 경복궁 내의 총독부 박물관에서 개최된 ‘시정(施政) 5주년기념 공진회(共進會)미술전람회’에 「인물」을 출품하여 은패를 수상한 것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16년 일본의 관전(官展)인 제10회 문부성미술전람회(약칭 문전)에 졸업 작품인 「해질녘」을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하면서 그의 뛰어난 재능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해질녘」은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누드화로서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명성은 1916년 12월 평양 재향군인회 연무장에서 가진 첫 개인전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 이 유화 개인전은 우리나라 근대 미술사상 최초의 개인전으로서,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평양 일대의 풍경을 다룬 작품 약 50여 점이 출품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면서 작품 활동을 벌였으며,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과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호수」(1922년작) 역시 나체의 여인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1919년부터 1921년에는 최초의 종합문예동인지인 ‘창조’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에는 동인문예지 ‘영대’의 창간동인으로 참가하였다.
1924년 김찬영(金瓚永) 등과 함께 회화연구소인 삭성회(朔星會)를 평양에서 조직하고 1925년에는 교육기관인 삭성회연구소를 개원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7년 무렵부터는 절필하고 평양에 머물며 화단활동에서 물러났었으나, 1954년 조선미술가동맹에 들어간 뒤로 활동을 재개하여 「모란봉」, 「해방탑의 여름」 등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과 그림도구들은 현재 조선미술박물관에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