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수암(守巖)이다. 그는 집안의 서화를 보며 성장하였으며, 당숙 죽계(竹溪)와 족조(族祖)되는 죽리(竹里)에게 각각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21세 무렵 평양에 정착한 이후에는 도화서 화원 양기훈(楊基薰)에게 사군자와 화조를 배웠으며, 다시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의 화법을 익히기도 하였다. 『황성신문』 1906년 12월 8일자에서 그가 서울 종로구 대안동(大安洞)에 자신의 호(號)를 내건 수암서화관(守巖書畵館)을 설립하여 앞으로 원하는 사람에게 법서명화를 수집 공급하겠다고 광고한 것은 한국 화랑의 효시로서 주목된다. 또한 1907년 7월 김규진(金圭鎭)과 함께 발의하여 서우학회(西友學會) 내에 민중의 예술교육을 담당할 교육서화관(敎育書畵館)을 개설하였다. 곧 이어 10월 평양의 대동관(大同館) 앞에 교육서화관을 마련하여 부녀자와 노동자의 교육에 필요한 서적이나 서화⋅문방사우⋅운동용품 등을 판매하였고, 12월 사업을 확장하면서 협성서관(協成書館)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3년 윤영기(尹永基)가 평양에 개설한 서화가 단체인 기성서화미술회(箕城書畵美術會)에 김윤보(金允輔), 노원상(盧元相) 등과 참여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1918년 결성된 서화협회의 정회원으로 중앙 화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였고, 1919년 12월 김규진의 서화연구회 전람회와 1920년 2월 인천상업회의소에서 개최된 김우범(金禹範) 서화회에 참석하여 휘호하는 등 창작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20년 3월 후쿠오카(福岡) 공업박람회에서 휘호하기 위해 출발하였으며, 1921년 7월 서울 삼청동에 사설 서화학원인 서화지남소(書畵指南所)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정치 사회적 변화에 따른 서화가로서의 한계를 느꼈는지 카네코 요시타로우(金子吉太郞)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1921년 설립된 평양기생학교에서 그의 『남화초단격(南畵初段格)』을 사군자 교재로 사용하였다. 1921년 12월 7일 인천 영화(永華)학교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다음 관민유지 초청으로 용금루(湧金樓)에서 휘호회를 가졌고, 1922년에는 개성 제1보통학교에서 황성하(黃成河)․황용하(黃庸河)와 함께 개성서화회전을 열었다.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서부의 「후출사표(後出師表)」를 시작으로 1924년 제3회 서부에 「전적벽부」, 제9회 동양화부에 「모란」, 제10회 서부에 「임탄은죽(臨灘隱竹)」이 입선하였다. 이밖에 1935년 1월 27일 의주, 1936년 5월 강동, 1936년 7월 백선행회관(白善行會館)에서 개인 서화전을 개최할 정도로 60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현전 작품에는 합작으로 그린 「화조사군자」 12폭 병풍(1917, 통도사성보박물관), 「조안도(鳥雁圖)」(1920년대, 홍익대학교박물관), 다수의 사군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