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석계(石溪), 내몽(乃夢)이다. 그의 출신 지역은 물론 생몰년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총독부 직속기관인 임시토지조사국의 서기(書記) 및 기수(技手)로 근무했던 것으로 보아 그림에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 6월 친일 귀족 김윤식(金允植)과 김가진(金嘉鎭)이 총독부 후원으로 개최한 시문서화의과대회(詩文書畵擬科大會)에서 그는 고대의 옷차림을 한 여인상으로 우승을 차지하였고, 노수현(盧壽鉉)은 2등, 최우석(崔禹錫)은 3등을 하였다. 또한 1918년 결성된 최초의 서화가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의 정회원이었으며, 1921년 10월경상남도 통영의 서화가 김○윤(金○潤)이 지역의 미술교육과 전람회 개최를 위해 서화예술관을 건립하고 그와 서예가 박면지(朴勉之)를 초빙하였다. 1922년 12월 결성된 여성화가 모임인 창신서화연구회(昌新書畵硏究會)에서 이규채(李圭彩)와 함께 강사로 서화를 지도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유하미인(柳下美人)」을 비롯해 1925년 제4회에서는 「청조(晴眺)」, 1926년 제5회에서는 「춘규(春閨)」, 1927년 제6회에서는 「조(朝)」가 입선하였다. 비록 김복진(金復鎭)이 『개벽(開闢)』에서 제5회 입선작에 대해 평가하면서 “조선 여자의 머리를 그리는 것은 쉽지 않아 그의 솜씨로는 다소 무리이며, 정측면 입상은 재고해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작품들은 모두 한복 차림의 여성을 소재로 한 일본풍 미인화로 동시기의 김은호(金殷鎬)와 비견될 만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밖에 『동아일보』 1927년 1월 22일자에 토끼 두 마리를 그린 동물화와2012년 옥션 단을 공개되었던 안중식(安中植) 화풍의 「산수도」 등으로 보아 일본의 사실적 화풍과 한국의 전통화풍을 동시에 구사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