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치명(稚命), 호는 석정(石渟). 판서 윤교성(尹敎成)의 아들이다.
1873년(고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1881년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69명의 영선사(領選使)가 청나라에 파견되었을 때 종사관(從事官)으로서 따라갔다. 그 뒤 영선사 파견 결과로 1884년 근대 병기공장인 기기국(機器局)이 설치되자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에 임명되었다. 1882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어직각(司禦直閣) 등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임오군란이 일어나 군민들이 중전 민씨를 찾아내려 할 때 민씨를 자신의 집에 보호한 뒤 여주를 거쳐 충주로 피신시켰다. 민씨의 도피·피신 중 측근에서 활약하면서 민비의 밀사로 입궁, 대원군의 제거를 위해 청나라에 청원할 것을 건의하였다.
임오군란이 실패로 돌아가고 민씨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와 개량개화파들이 결합, 관제개혁이 진행되어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편될 때 농상사협판(農商司協辦)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군제개혁도 아울러 진행되어 신건친군영(新建親軍營)이 조직되고 좌영·우영으로 나뉘어 편제되자 우영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884년에 기존 2영에 전영(前營)·후영이 증설되어 4군영제로 확대되면서 후영사로 임명되었다.
중앙에서 개화당과 수구당의 대립이 한층 격화된 그 해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을 기해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살해할 때 부빈(部賓)으로 초청되었다.
그 날 밤 숙직인 관계로 참석하지 않았으나, 고종이 경우궁으로 행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가 독립당의 장사패인 윤경순(尹景純)에게 살해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편서로 『형향록(馨香錄)』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