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할아버지는 판서 조병준(趙秉駿)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성하(趙成夏)이다.
1883년(고종 20) 교관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885년 이조참의·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규장각 직제학을 지냈다.
1887년 부호군으로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를 거쳐 시강원 겸보덕에 임명되었다. 1888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특별히 발탁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1889년 경기도 관찰사를 제수되었다.
그런데 이해 경기도 연해의 각 읍에 흉년이 들자 중앙에 계(啓)를 올려 진휼자금을 요청하는 등 기민(饑民)의 구휼에 힘썼다. 그리고 대왕대비전옥책문(大王大妃殿玉冊文)의 서사관(書寫官)도 맡아보았다. 이듬해 안성민요가 발생하자 의정부에 계를 올려 탐학으로 민요가 일어나게 한 안성군수 최낙주(崔洛周)를 유배시키도록 하였다.
곧이어 강화유수로 자리를 옮겨 대왕대비의 병이 위중하자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별입직(別入直)하였다. 그리고 대왕대비가 죽은 뒤에는 종척집사(宗戚執事)·신백서상자(神帛書上字)·행장서사관(行狀書寫官)·향관(享官) 등을 맡았으며, 장례문제와 관련하여 시원임각신(時原任閣臣)의 연차(聯箚)에도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1892년 가자(加資 : 품계를 올려 줌)되었고, 상호도감(上號都監)의 익종대왕옥책문(翼宗大王玉冊文)의 서사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3년 형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의 우참찬·좌참찬 등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으며, 1895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으로 칙임관(勅任官)이 되었고, 빈전제거(殯殿提擧)도 맡았다. 1896년 칙임관3등이 되고 혼전향관(魂殿享官)·경연원시강(經筵院侍講) 등에 임명되었다.
1897년 국장도감(國葬都監)·산릉도감(山陵都監)·빈전도감(殯殿都監) 등의 제조를 지내고 그 공로로 가자되었으며, 태의원경(太醫院卿)에도 임명되었다. 1898년 궁내부 특진관으로서 규장각학사 겸 시강원일강관(奎章閣學士兼侍講院日講官)이 되고, 칙임관 3등이 주어졌다.
그 뒤 다시 특진관이 되었다가 이듬해 시종원경(侍從院卿)을 맡아 대왕대비악장문(大王大妃樂章文)의 제술관(製述官)으로도 활약하였다. 1900년 궁내부 특진관과 함께 칙임관 2등이 주어지고, 장례원경(掌禮院卿)·귀족원경(貴族院卿)·홍문관학사 등을 역임하였다.
1901년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양지아문총재관(量地衙門總裁官) 등을 지내고, 칙임관 2등이 되었으며, 정익황후악장문(貞翼皇后樂章文)의 제술관도 맡았다. 1902년 궁내부 특진관을 거쳐 의정부 찬정 등을 역임하고, 칙임관 1등이 주어졌다. 이 해 의정부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등과 함께 이용익(李容翊)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