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조약은 1884년(고종 21)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1884년 11월 24일에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권력을 잡은 민씨정권은 정변에 개입한 일본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가 압도하고 있는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조선 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병력과 군함을 파견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무력을 앞세운 교섭으로 5개 조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조선 측 전권대신 김홍집(金弘集)과 일본측 전권대신 이노우에[井上馨]가 조인하였다.
갑신정변은 조선 · 청나라 · 일본의 정치적 국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청나라군의 도움으로 정변을 진압하고 다시 권력을 잡게 된 민씨정권은 예조참판 서상우(徐相雨)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다케조에[竹添進一郎] 공사를 통해 정변에 개입한 사실에 대해 항의하였다. 또 김옥균(金玉均) 등 정변 중심 인물의 인도를 요구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보였다.
한편, 청나라는 당시 월남(越南)문제로 프랑스와 국제 분쟁에 휘말려 있었다. 때문에 갑신정변으로 인한 청 · 일의 충돌을 평화적으로 수습하려고 하였으며,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일본세력의 조선 침투를 억제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쌓였던 배일감정으로 흥분한 한성시민들에 의해 일본공사관이 불탔고, 임오군란으로 일본공사관 무관 등 40여 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은 계속해서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에 압도당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이러한 관계를 일시에 역전시키고자 강경책을 취하였다. 조선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지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救恤金) 지급 등을 요구하며, 강력히 교섭을 전개하였다. 우선 일본은 일시 본국으로 피신하였던 다케조에 공사를 다시 조선에 파견하여 예비교섭을 펴도록 하였다.
그 뒤 외무경 이노우에를 전권대신으로, 외무대서기관(外務大書記官) 곤도[近藤眞鋤],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Stevens, D. W.), 육군 중장 다카시마[高島鞆之助], 해군 소장 가바야마[樺山資紀] 등을 수원(隨員)으로 하는 교섭단과, 2개 대대의 병력과 7척의 군함도 함께 파견하여 무력을 배경으로 강경한 교섭을 폈다.
다케조에 일본공사는 「사변시말서(事變始末書)」를 가지고 조선 정부에 정변 당시 자신이 취한 행동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공사가 사건의 당사자일 뿐 아니라 난도를 비호하여 일본으로 피신시킨 인물이니 만큼 교섭의 여지가 없다고 강경하게 대응하여 결국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884년 11월 18일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가 대부대를 이끌고 한성에 들어오자, 조선에서는 좌의정 김홍집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고 22일부터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일본이 요구한 3개 조건 가운데 공사관 건축비를 반감하여 2만원으로 하고, 이미 약정된 공사관 호위병을 1,000명씩 주둔시킨다는 조항을 삭제하였지만, 대체로 일본 측 요구대로 타결되었다. 그리고 김옥균 등의 인도를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1884년 11월 24일(양력 1885년 1월 9일)에 체결된 한성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 조선국은 국서(國書)를 일본에 보내어 사의를 표명한다.
제2. 일본국 조해인민의 유족 및 부상자를 휼급하고 상민의 화물이 훼손, 약탈된 것을 보전하여 조선국에서 10만원을 지불한다.
제3. 이소바야시[磯林] 대위를 살해한 흉도를 사문 나포하여 엄벌에 처한다.
제4. 일본공관을 신기지로 이축함을 요하는 바 조선국은 마땅히 기지 방옥을 교부하여 공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하도록 할 것이며, 그 수축 · 증건에 있어서는 조선국이 다시 2만원을 지불하여 공사비에 충용하도록 한다.
제5. 일본 호위병의 영사는 공관 부지를 택하여 정하고, 임오속약(제물포조약을 가리킴) 제5관에 비추어 시행한다.
별단(別單)
약관 제2 · 4조의 금액은 일본화폐로 계산할 것이며, 3개월을 기하여 인천에서 완불한다.
제3조의 흉도를 처단함은 입약 이후 20일을 기한으로 한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양국관계는 매우 긴장된 상태였고, 일본의 입장은 난처한 처지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본은 오히려 무력을 앞세워 한성조약을 체결하므로써 위기를 모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청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