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치문 ()

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약현천주교회를 기공한 천주교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33년(순조 33)
사망 연도
1892년(고종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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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개항기 때, 약현천주교회를 기공한 천주교인.
생애 및 활동사항

교명은 다두(Thaddaeus). 1866년부터 6년 동안 계속된 병인교난(丙寅敎難)으로 성직자가 없게 된 조선 천주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873년 권치문은 조선 교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교인인 조(趙)베드로·오치옥(吳致玉)·김성흠(金聲欽) 등과 상의, 조선 교구의 제6대 교구장인 주교 리델(Ridel,F.C.)이 만주 차구(岔溝)에 임시로 개설한 조선교구해외임시본부에 성직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직접 성직자 영입 운동의 비밀 연락을 담당하여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 귀국할 때마다 국내 교회 경비로 쓰기 위한 재원인 마제은(馬蹄銀)을 비밀리에 들여왔다.

그 뒤 그 사실이 알려져 위험이 닥치자 평안도·강원도·경기도의 산간 벽지에서 지내다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자 다시 상경해 교회를 재건하는 데 헌신하였다. 그 해 다시 만주 차구(岔溝)로 들어가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고, 리델의 청에 의해 4년간 그 곳에 머물며 『한불자전(韓佛字典)』 편찬을 도와 이를 완성시켰다.

1880년 11월에 주교 뮈텔(Mutel,G.C.M.)과 신부 리우빌(Lioville,L.N.A.)를 대동하고 해로를 이용해 장연에 도착, 성직자 영입의 뜻을 이루었다. 귀국한 뒤 서울 수렛골(車洞: 지금의 서대문구 순화동)에 거주하며, 1888년에는 그 동안 많은 순교자를 낸 서소문 밖 네거리 한쪽을 사들여 강당을 지었다.

1891년 그 곳의 교인들과 힘을 모으고 신부 두세(Doucet,C.E.)와 상의하여 김군선(金君善)의 토지를 매입,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물인 약현천주교회(藥峴天主敎會)를 기공하였다. 그러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참고문헌

『약현교회사』(중림동교회, 1976)
『한국천주교회사』(류홍렬, 가톨릭출판사,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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