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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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사건
외교적 절충을 통해 해결된 기독교 교회와 정부, 교인과 비교인 사이의 분쟁 및 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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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외교적 절충을 통해 해결된 기독교 교회와 정부, 교인과 비교인 사이의 분쟁 및 사건.
개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점차 개화정책을 취해온 정부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여 서양에 대해서도 쇄국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자 서양인들이 우리 나라에 진출하게 되고, 철저한 쇄국양이(鎖國壤夷)와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상징인 척화비도 제거되면서 개화시대로 접어들었다.

한편,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면서 정부가 발행하는 일종의 여행허가서인 호조(護照)를 지니고 선교사들은 국내 각지를 여행하면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로써 사실상 기독교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박해는 종지부를 찍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100여 년 간에 걸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척사위정의 정신이나 박해의 의식은 사회적으로 체질화되어 있어서 쉽사리 해소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박해정책의 종식이 국가정령(國家政令)으로 명백하게 국민 앞에 공포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회적·민중적 차원에서의 반기독교적 박해와 배격의 동향은 여전하였다.

그러므로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개인이나 사회집단 또는 지방관리들에 의한 기독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여러 모로 계속 야기되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정부의 박해정책이 점차 완화됨에 따라, 오랫동안의 탄압으로부터 풀려난 해방감 속에서, 일부교인들의 슬기롭지 못한 행동으로 교인과 민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고,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보상받은 선교사들의 월권행위에 의한 분쟁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독교문제로 야기된 분쟁이 당사자들 사이에서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고 외교사안(外交事案)으로 확대된 사건이 곧 교안이다. 교안은 유교적 전통사회에 있어서, 국가정책이 박해에서 신교자유(信敎自由)의 허용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치적·외교적 분쟁이라고 볼 수 있다.

교안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시기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 나라의 외교권이 일본에 의하여 박탈당할 때까지의 약 20년 간이다. 그간에 발생한 교안은 그 대상과 원인에 따라 여러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전교신부나 선교사가 직접 관련된 교안인데, 전교활동의 자유가 실현되어 선교사들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공연하게 전교활동을 함에 따라서, 지방민들의 이들에 대한 배척·폭행·추방 소동이 일어나 교안으로 확대되는 일이 생겨났다.

1888년 원산에서의 드게트(Deguette)신부 축출소동, 1890년 전주에서의 보드네(Baudenet)신부 축출소동, 안변(安邊)에서의 마라발(Maraval)신부 축출소동, 1892년 수원에서의 빌렘(Wilhelm)신부에 대한 폭행사건, 그 밖에 여러 곳에서 일어난 선교사 축출소동과 폭행사건이 원인이 되어 교안이 일어났다.

1895년 원산에서의 브레(Bret)신부의 발포사건, 1897년 칠곡에서의 파이아스(Pailhasse)신부의 총기사건 등, 지방순시 도중의 위급에 대비하기 위해 소지했던 전교신부의 총기사용으로 인한 교안과, 1888년 서울에서 전교신부들이 어린이를 유괴해다가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다는 유언비어로 야기된 교안, 1897년 진주에서의 우도(Oudot)신부 사건 등, 교인과 비교인의 분쟁에 선교사가 개입되어 일어난 교안 등이 그 예이다.

이들 교안은 각지에서 교인들이 비교인들로부터 부당한 박해를 받고, 그 부당행위를 지방관이 비호하고 있음으로써 전교신부나 선교사가 외교적 특권을 발동하여 교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개입하게 된 것이 문제가 되고, 지방관의 법률행위가 부당하여 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으므로, 이러한 불법처사에 전교신부나 선교사가 간섭하게 됨으로써 야기되었다.

둘째, 교(敎)·민(民)의 다툼에서 벌어진 교안은, 공식적인 박해는 완화되었다. 그렇지만 척사위정의 사회적 전통은 일시에 변화될 수가 없어, 박해에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교회와 교인, 그리고 전통적인 척사와 배외를 고집하는 민간인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대립·폭행·소송·파생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약세에 몰리거나 부당한 처사를 받게 되는 교인들이 선교사나 공사관에 호소하여 도움을 청하게 될 때, 그 사건이 교안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교민간의 분쟁의 원인으로는 외국인과 통하거나, 외국의 종교를 믿고 있다는 단순한 시비로부터 전답·가옥의 매매를 둘러싼 시비, 산간초림의 무단개간이나 벌채로 인한 시비, 채무관계, 분묘문제, 여성문제 등 잡다하다. 이런 종류의 교안도 약 50건에 달해 정부와 교회 측 모두가 이의 해결을 위해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그 중에는 자탁교인(藉託敎人), 즉 교회의 영향력을 악용하여 자기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입교한 신자에 의해 야기된 것도 있어 교회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특히, 동학혁명 후 정부의 동학교도들에 대한 추적이 심해지자 일부는 일신의 안전을 위해 교회에 의탁하였는데, 이들 가탁교인(假託敎人)의 작폐에 의한 시비가 많았다.

셋째, 지방관들의 작폐에 의해 야기된 교안인데, 조불조약의 체결로 박해정책은 멈추었으나, 일부 보수적이며 척사적인 정신을 가진 지방관들은 정부의 뜻과는 달리 자기 직권으로 교회와 교인들에 부당한 박해를 가해서 교안이 발생하였다.

1887년과 1890년에 경기도관하 제읍(諸邑)에서 외국인과 관계있는 내국인 가운데 문제인물들을 일괄조사하여 보고하라는 관찰사의 지시가 하달되어 문제가 생겼다. 1892년에는 전라도지방에서도 관내사학지류(管內邪學之類), 즉 천주교도, 야소교도(耶蘇敎徒)의 명부를 작성, 보고하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교회가 이를 전면 거부하고 나서 급기야 문제가 확대되었다. 그 밖에도 일부 자탁교인의 행패를 빙자하여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지시하여 교안으로 확대되는 일도 있었다.

넷째, 사회조직이나 단체에 의해 야기된 교안으로, 동학·일진회(一進會) 등이 의식적으로 야기시킨 것이 그 예이다. 동학은 교조의 <포덕문 布德文>에 나타나 있듯이, 반서교적(反西敎的)인 색채가 농후한 교단으로, 동학혁명이 전개되면서 반침략·반봉건의 성격을 뚜렷이 하여 서교인(西敎人), 즉 기독교도들을 양이(洋夷)를 따르는 자로 규정하고 박해를 가하였다.

삼남 각지에서 외국인선교사나 전교신부에 대하여 불법적인 가해행위를 자행하고, 여러 곳에서 교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등으로 해서 교안을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899년 안변동심계원(安邊同心契員)의 교인축출소동과, 1901년의 상주향약동심계(尙州鄕約同心契)의 천주교 추방결의 등 유교적 향촌의 향약에 의해 기독교인을 향리에서 추방하거나 징벌을 가하는 집단행위로 인해 일어난 교안도 있다.

그리고 보부상들의 상부상조와 공동이익을 위한 동업조합조직인 상무사(商務社)와 황국협회(皇國協會)는 보수적인 성향의 사회조직이어서, 때로는 집단적으로 교회나 교인에 대해 폭력을 감행하는 일이 있었다. 1903년의 해서교안(海西敎案)도 정부가 파견한 안핵사(按覈使) 이응익(李應翼)이 보부상을 동원하여 교안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그 밖에 1905년에서 그 이듬해에 걸쳐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원들이 전라도 각지와 여러 도서지방에서 교회와 교인들을 공격한 교안이 있었으며,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교난(敎難)은 우리 나라 최대의 교안으로, 교인과 민간 사이의 일주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7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상과 같이 교인과 민간 사이의 대립과 분쟁, 전교신부나 선교사에 대하여 위해(危害)를 가하거나 활동방해, 지방관의 부당한 처리로 인한 분쟁, 또는 사회조직에 의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현지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선교사는 주교에 보고하는 한편, 선처를 요청하게 되고 주교관에서는 이 문제를 자국의 공사관에 외교적 절충을 부탁하면 공사는 외부에 통고하여 문제해결을 절충하게 된다.

외부는 그 요구가 타당한가를 검토한 후 내부에 대책을 강구하도록 요청하고, 내부가 현지관료에게 지시를 내려 문제해결의 결말을 보게 된다. 물론, 각지에서 발생한 교안들 중 현지의 선교사와 지방관 사이의 직접적인 절충으로 해결되는 예도 있으나, 프랑스나 미국공사와 우리 외부의 외교적 절충이 있은 뒤에야 귀결되는 예가 허다하였다.

그러나 교안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국내문제였고, 또한 교회와 관계기관과의 문제로 외교문제로 확대될 성질의 분쟁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이처럼 자주 벌어진 교안이 청나라에서와 같이 관계국 병력의 동원과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악용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이어서 1904년의 선교약조(宣敎約條)로 진전되어 교안 발생의 소지가 점차 소멸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의하여 박탈되어 1906년에 대한제국 외부가 폐지되었고, 각국 외교공관이 철수하게 되자, 교인과 민간 사이의 대립·분쟁이 확대되어 외교분쟁화되는 교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매천야록(梅泉野錄)』
『운양집(雲陽集)』
「조선말기사회의 대서교문제연구 - 교안을 중심으로 한-」(이원순, 『역사교육』 15, 역사교육연구회, 1973)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최석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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