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문(汝聞). 서울 출신. 홍재룡(洪在龍)의 손자로, 판서 홍석종(洪奭種)의 아들이며, 헌종의 비인 효정왕후(孝定王后)의 조카이다.
1874년(고종 11) 증광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대교에 임명되었다. 이어 장령 · 부응교를 거친 뒤, 1877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여주 목사를 역임하였다.
1882년 개성부 유수로 승진하였다가, 1884년 이조 참판 · 홍문관 부제학, 1887년 성균관 대사성, 1888년 대사헌 · 규장각 직제학이 되었다. 예조참판을 거친 뒤, 1890년 지경연사(知經筵事) · 형조판서, 1891년 한성부 판윤 · 예조판서, 1892년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893년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중, 황주에서 향촌 세력과 향리 등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백성이 민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난을 이끈 이관석(李寬石) 등을 엄벌에 처한 뒤 귀양보냈다. 또한 탐학하여 백성을 괴롭힌 자들을 엄하게 징계하였다.
1894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 해 갑오개혁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8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1895년 왕태후궁대부가 되었다. 그 뒤 국장도감 제조와 장례원경(掌禮院卿) · 명헌태후궁대부(明憲太后宮大夫)를 역임하였다.
1901년 판돈녕부사 · 명헌태후궁대부, 1902년 태의원경(太醫院卿) ·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 표훈원 부총재(表勳院副總裁), 1903년 태의원경, 1904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 표훈원부총재 · 판돈녕원사 · 홍문관학사 · 규장각학사 · 시강원일강관(侍講院日講官) · 중추원찬정(中樞院贊政)을 거쳤다. 1906년 이후에도 궁내부특진관과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일강 관직을 여러 차례 맡았다.
1908년에는 교육 · 위생 · 환난을 서로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관진방회(觀鎭坊會)의 찬무장(贊務長)을 맡아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 정부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