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중국에 대해 제후국을 자처했으므로 왕실봉작제도 제후의 예에 따랐다. 따라서 왕의 조모는 왕대비(王大妃)라 했다.
1894년의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일본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황제체제로 전환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1896년을 전후하여 제후국체제에 맞게 규정되었던 왕실봉작제가 황제체제를 기준으로 하여 변화되었고 이어서 건양 연호를 사용하였다. 과거 동양사회에서 연호의 사용은 중국체제로부터의 이탈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징표였다.
건양 연호를 사용하기 직전에 조선은 국가체제를 황제체제에 의거해 개편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왕실봉작제였다. 그런데 이때는 완전한 황제체제가 아니라 제후체제와 황제체제가 혼합된 과도기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고종의 호칭도 전하(殿下)에서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라 하여 황제체제도 아니고 제후체제도 아닌 중간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 밖에 왕비는 왕후로, 왕대비는 왕태후로, 세자는 왕태자로, 세자빈은 왕태자비로 바뀌어 모두 제후체제와 황제체제를 혼합한 호칭을 갖게 되었다.
이 때 왕대비로 있던 헌종비 효정왕후를 왕태후로 책봉하고 왕태후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는 왕태후궁을 설치했다. 왕태후궁에는 칙임(勅任)의 대부(大夫) 1명, 주임(奏任)의 이사(理事) 1명, 그리고 판임(判任)의 주사(主事) 3명이 배속되었다.
건양 연호를 사용한 지 1년 만에 조선은 광무(光武)로 연호를 바꾸고 고종이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조선은 명실상부한 황제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왕실봉작제도 완전한 황제체제에 의거하여 정비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