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은 프랑스의 실증주의 철학자 콩트가 창안한 인간사회에 대한 학문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지적 운동의 산물이다. 사회에 대해 개체주의적 접근을 비판하고 비과학적인 태도를 거부하며 사회의 질서와 변동에 관심을 보였다. 우리나라에는 20세기 초에 중국과 일본을 통해 전래됐다. 스펜서가 제창한 ‘Sociology’를 중국에서 옮긴 말인 ‘군학’과 일본에서 옮긴 말인 '사회학'으로 썼다가 사회학으로 통용되었다. 사회학은 일제강점기 도입단계를 거쳐 광복에서 1960년대에 이르러 정착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 제도·연구·발표의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지적 운동의 열매로, 콩트(Comte, A.)와 스펜서(Spencer, H.)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사회는 단순히 개인의 총합이라는 개체주의적 접근을 비판하고, 인간과 사회를 사변적으로만 이해하는 비과학적인 태도를 거부하며, 사회의 질서와 변동에 대하여 이론적 관심을 보인 것이 사회학의 지적 전통이었다.
우리 나라에 사회학이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였다. 서양문물의 도입과정이 주로 그러했듯이 사회학도 한편으로는 중국대륙을 통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스펜서의 『사회학(Study of Sociology)』에서 ‘Sociology’를 군학(群學)으로 옮겨 쓴 것이 1903년이었는데, 우리에게는 1909년 장지연(張志淵)의 『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에 의해 그 말이 소개되었다.
그는 여기서 콩트와 스펜서에 의해 성립된 ‘군학’을 소개하였다. 일본에서는 군학이 아니라 ‘사회학’으로 옮겼고, 이 학문은 최초의 신소설을 쓴 이인직(李人稙)이 1906년 월간잡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에 연재, 소개하였다. 장지연은 여기서 사회학의 정의와 종류, 사회 이론의 중요성, 스펜서의 진화론 등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얼마가지 않아 군학이라는 낱말 대신에 사회학이라는 낱말이 통용되었다.
사회학은 1910년대 우리나라의 선각적 지식인들에게 비교사회적 관심을 주었으며, 사회의 진보와 진화의 맥락에서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다툼을 냉엄히 주목하게 하는 민족 각성의 이론적 도구를 제공하였다. 구한말에 들어온 사회학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3단계의 전개과정을 밟아왔다. 첫째는 일제강점기의 도입단계이며, 둘째는 광복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정착단계이며, 셋째는 1970년 이후의 확장단계이다.
(1) 도입단계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자 모든 학문적 활동이 침체되고 좌절되었다. 그러나 사회학을 소개하려는 작업 자체의 맥박은 끊어지지 않았다. 1912년 정광조(鄭廣朝)는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에 사회학에 관한 글을 2회에 걸쳐 실었다. 여기서 그는 사회학의 창건자 콩트, 교섭작용, 교섭작용 속의 인간, 교섭관계로서의 조직, 분업이나 협력과 같은 사회의 특성, 가족, 학교, 국가, 그 밖의 집단을 포괄하는 사회의 범위, 사회유기체설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1915년 잡지 『공도(公道)』에 필자가 밝혀지지 않은 「스펜서의 사회사상」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스펜서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짜임새 있게 정리되어 있다. 3 · 1운동 이후 활발한 지적 활동이 펼쳐진 1920년대는 대학수준에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출판지면도 넓어졌다. 따라서 사회학에 대한 소개의 글도 보다 빈번하게 나타났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최정순(崔珵淳)은 졸업하던 해인 1920년 『학지광(學之光)』에 사회진보의 개념과 이론을 다룬 「사회생장(社會生長)의 사회학적 원리(社會學的原理)」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발전을 위한 상호협력과 협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 뒤 1926년 고영환(高永煥)은 퇴니스(Tonnies, F.)가 1924년 이탈리아 사회학협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사회의 변화와 사상의 변천」이라는 제목으로 『시종(時鐘)』 창간호에 소개였다. 이 밖에도 사회학과 관련된 글들이 잡지와 신문에 많이 실었다.
1930년대는 사회학의 도입통로가 일본이라는 이차적인 중간지점을 거치지 않고, 유럽과 미국으로 직접 이어지는 본격적 도입시기였다. 이 시기는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 저서를 펴내고 고등교육기관에서 사회학 강의를 널리 개설했던 시기였다. 대표적인 경우는 다음과 같다. 1930년 『근대사회학』을 출판한 김현준(金賢準)은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보성전문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그는 독일 사회학을 소개하는 한편, 우리 사회의 짜임새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였다.
1933년 『사회학개론』을 내놓은 한치진(韓稚振)은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가르치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당시의 미국 사회학의 이론과 방법을 소개하면서 우리 사회의 개혁과 개조를 지향하는 지적 지향성을 보여주었다. 이어 같은 해 『사회과강의(社會科講義)』를 펴낸 공진항(孔鎭恒)은 프랑스 소르본느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주로 천도교 기관을 통하여 천도교사상과 사회학을 이어보기도 하며, 사회 실체를 강조하는 프랑스의 사회학 이론을 소개하였다.
뒤이어 하경덕(河敬德)이 1930년에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부터 10여년 간 연희전문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3 · 1운동 이전에 이미 원한경(元漢慶, Underwood, H. H.)에 의해 심리학과 더불어 사회학 강의가 시작된 곳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회학 강의가 이루어진 것은 하경덕에 이르러서였다. 그의 학위논문 「사회법칙─사회학적 일반화의 타당성 연구 Social Law─A Study of the Validity of Sociological Generalization」이 1930년 미국에서 출판되었을 만큼 그는 국제적인 수준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그리고 강의안인 『사회학촬요(社會學撮要)』를 발간하여 연희전문학교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회학을 보급, 소개함으로써 당시의 누구보다도 영향력이 컸다.
이와 같이, 1930년대는 훈련된 인적 자원이 비교적 풍부했고, 이들에 의한 사회학의 도입이 활발하였다. 사회학의 정통적 관심에 따라 우리 사회의 개량 · 개조가 이론적으로 논의되었던 넓은 의미의 ‘사회학적’ 시대였다.
(2) 정착단계
1930년대를 채 넘기기도 전에 식민지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어 새로운 학문운동은 시들어버렸다. 사회적 여건만 허락했다면 쉽게 정착될 수 있었을 사회학은 끝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사회학의 정착은 먼저 제도적인 수준에서 나타났다. 식민지 교육기관이 정리되고 국립대학교가 세워지자, 1946년 이상백(李相佰)이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설립하였다. 뒤이어 1954년 경북대학교에,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에, 1963년 고려대학교에 각각 사회학과가 설치되었다. 서울대학교의 교수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로 충원되었기 때문에, 광복 후 얼마 동안은 1930년대의 활기찬 다양성에서 다소 후퇴한 듯이 보일 만큼 일본 학계를 통하여 도입된 사회학이 연구분위기를 주도하였다.
제도적 거점은 있었으나 학문적 수준의 도약이나 사회학이론과 방법의 폭넓은 다양성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1950년으로부터 몇 년 동안은 한국전쟁으로 피폐된 상황과 혼란 속에서 사회학의 발전이 무척 더뎠던 시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회학연구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는 우리나라 사회학의 연구지향성을 규정하는 구조적 조건이 되었다. 사회학자가 미국에 다녀오는 통로가 넓어지자 일본식이거나 일본을 통해 전수되었던 사회학은 곧 미국식이거나 미국을 통한 사회학연구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 마구 쏟아져나온 사회조사방법에 의한 연구가 이러한 새로운 학문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것은 어느 한 대학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풍미했다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사회학은 사회조사연구요, 사회조사연구는 사회학이라는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사회조사방법에 의하여 우리 사회의 여러 측면을 연구하는 데 기여한 사회학자들은 고황경(高凰京) · 이만갑(李萬甲) · 이해영(李海英) · 이효재(李効再) · 홍승직(洪承稷) 등이다. 가족 · 농촌 · 도시 · 가치관 · 태도 · 계층 · 인구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사회조사방법은 편리하고도 유용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당시 주목을 끌고 있던 미국의 구조 · 기능분석론이 소개되고 파슨스(Parsons,T.)와 머턴(Merton,R.)의 이름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개는 이론에 대한 검토나 비판적 이해보다는 단순한 도입과 소개에 머물러 있었으며, 우리 사회의 인식에 의미 있는 이론적 접합이나 적용의 시도는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거기에다가 이러한 이론적 작업이 자체적으로 시도되기도 전에 기능주의이론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던 갈등이론 등도 함께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황성모(黃性模)만이 미국식 사회학에 대비되는 외로운 대안자였을 뿐이다.
사회학의 연구지향성이 미국식 조사방법에 의해 지배된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그 연구의 질적 가치가 어떠하든 연구의 양적 증대를 가져온 시대였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학이 대학교의 독립된 학과로 제도화됨에 따라 사회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터전을 확보했기 때문이었으며, 연구생산자의 재생산과정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행적인 이론과 방법에 크게 좌우됨이 없이 몇몇 사회학자들은 필생의 연구과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최재석(崔在錫)의 한국가족연구로 그는 현지연구와 역사연구를 곁들여 꾸준히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3) 확장단계
1970년대 이후의 사회학연구는 몇 가지 점에서 두드러진 확장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첫째, 몇몇 대학에 한정되어 있던 사회학과가 주요사립대학교와 지방의 국립대학교에서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4개 대학에 지나지 않던 사회학과가 1988년 현재 31개 대학으로 확장되는 제도적 성장을 보게 된 것이다. 학과의 증설은 단순한 제도적 정착의 계속이 아니라, 사회학의 위치와 존재양식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사회학에 대한 관심의 통로가 넓어진 것이며, 사회과학에서 차지하는 사회학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이며, 사회학도의 활동영역을 넓힌 것이기도 하다.
특히 독립된 사회학과가 거의 모든 대학에 설치되는 확장과정은 이제까지 한두개의 사회학과가 주도했던 사회학의 무대를 확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비록 갑작스럽게 확장된 신설학과의 교수진이 기존의 한두 대학에 의해 대부분 충원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활동무대는 이들 한두 대학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전국적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이처럼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는 주요 대학에 사회학과가 창설되는 제도적 확장의 단계였던 것이다.
둘째, 제도적 확장은 연구의 확장을 가져왔다. 사회조사방법으로 훈련된 사회학자들은 국내외의 연구비를 얻어 인구 · 산아제한 및 산업화에 따른 농촌과 도시의 문제 등과 관련된 상당한 수의 연구물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종전의 연구경향을 답습, 계승하는 것이었다. 내용면에서 연구의 지평을 확장시킨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의 표명과, 사회학이론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의 관심이었다.
몇몇 사회학자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가족제도의 역사, 사회지배층과 계층 일반, 독립협회를 비롯한 근대의 사회사상으로부터 일제시대의 사회상, 근대의 사회변동과 사회운동, 심지어는 조선시대의 종교와 사상 등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이 새로운 연구경향으로 주목되고 있다.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온 최재석 · 김영모(金泳謨) · 신용하(愼鏞廈), 그 밖에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정재식(鄭載植)과 박영신(朴永信)은 사회학과 역사연구를 접합시키려는 연구경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사회학이론에 대한 관심도 확장되었다. 사회조사방법이 주도하던 시대에는 사회학이론은 주변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미국이론의 약식소개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수준의 관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사회조사방법의 테두리 속에서 훈련받지 않은 몇몇 사회학자들이 외국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돌아오면서부터, 이차적인 자료에 바탕하여 논의하던 사회학이론의 주요 내용을 직접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한편, 이론의 관심영역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벌써부터 베버(Weber, M.)에 관심을 두어왔던 이순구(李舜求)와 더불어 베버 · 뒤르켐(Durkheim,E.) · 파슨스, 그 밖의 유럽 사회이론의 연구에 단순한 소개 이상의 관심을 보이는 사회학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셋째, 연구인의 숫자와 영역이 확장되면서 사회학연구의 출판도 확장되었다. 1964년부터 한국사회학회지로서 『한국사회학』이 발간되어왔다. 그러나 사회학자들 사이의 학문적 의사소통이나 사회학연구의 관심을 자극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은 그다지 크지는 못하였다. 1970년대부터 전문 · 비전문가가 번역한 외국문헌이 수많은 출판사에 의하여 계속 발간되고 있는 것이 사회학의 확장에 보다 크게 기여하고 있는듯하며, 뒤바꾸어 그것은 사회학의 확장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사회학자가 쓴 교과서 수준 이상의 단행본이 상당수 출판되었던 것도 특기할만하다. 그 중 특히 김경동(金璟東)과 한완상(韓完相)의 글들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표지에 적고 있지 않은 여러 정기간행물에서도 사회학적 글을 간간이 실었다. 그 가운데 사회학에 관한 한 『현상과 인식』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인문 · 사회 과학분야를 망라하는 순수학술논문만을 싣는 계간지로 1977년 봄 이후 70편 이상의 사회학적인 글을 실었다. 특히, 베버의 죽음 60돌을 기념하는 학술모임에서의 발표내용 모두를 1980년 겨울호에 싣고 있다는 것은 특별히 기록해둘 만하다.
이상에서 보듯이, 사회학은 제도 · 연구 · 발표의 수준에서 확장되어왔으며, 그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였던 이전의 단계에 비하여 다양화, 다원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학이라는 새 학문이 한말에 도입, 소개되고, 그것이 광복 이후 독립된 학과로 대학 속에 정착되어가다가, 1970년대에 접어들어 여러 수준에서 몇 단계의 확장과정을 밟아오면서 우리나라 사회학은 상당히 성장하였다. 양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사회학연구는 성장하였다.
이러한 단계적 성장을 인정하면서도, 지금까지 한국사회학의 주요특징을 이루고 있었던 초기적인 ‘수입’의 형식을 띤 글이 지금까지도 많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1930년대의 사회학과 오늘의 사회학은 이 점에서 그 유형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부터 사회조사연구가 주도해온 한국사회학의 단조로운 연구방법에 어떤 대안이나 수준상의 큰 발전이 없이 그 연구유형을 지켜오고 있는 것도 오늘의 연구상황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우리 사회학이 짊어지고 있는 문제점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학이 들어온 지 100년이 넘어선 우리 사회학이 자주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발전을 이룩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 사회학은 앞으로 이론 자체에 대하여 보다 깊은 연구를 펼칠 필요가 있다. 사회조사연구가 오랫동안 사회학의 흐름을 주도해오면서 연구의 양적 생산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상대적인 무시나 몰이해를 가져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론에 대한 인식과 이론과의 관련성이 간과(看過)된 채, 조사방법이라는 간편한 도구에 내맡겨져온 연구경향은 조사방법과 방법론을 혼란시켰다. 그런가 하면, 사회학이론에의 도전을 경시하는 몰이론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무엇이 경험적인 것이며, 과학적 지식의 생산은 무엇이며, 개념의 경험적 준거는 또 무엇인가 하는 물음 등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 방법론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을 제외한 방법은 방법론상의 큰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것은 결코 사회학 자체의 이론적 발전을 이룩하게 해 주지 못할 것이다. 이론 자체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깊이를 더할 때, 양적 정착과 확장 위에서 질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의 사회학연구는 이론과 역사적 경험세계 사이에 보다 긴밀한 관련성을 세워야 한다. 바깥 사회학의 이론과 방법을 계속 받아들이되,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더 깊이 캐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것을 역사적 경험세계와 변증법적으로 이어놓아야 한다. 오늘의 사회학연구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여 역사적 경험내용으로 돌아가 몰두하는 하나의 주요흐름이 생긴 것은 바깥 사회학을 단순히 소개하거나 복사하는 식의 일을 능사로 삼는 오늘의 우리 사회학에 실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한 소개나 도입에 머무르는 일을 극복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과의 접합이 없는 단순한 역사적 경험 내용의 서술 자체도 극복하여야 한다. 이것은 몰사회학적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이 명백히 사회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때 그 특유의 기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사회학됨’을 잃어버린다면 그것다운 기여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다시 말해서 사회학은 역사적 경험 내용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사변적 학문이거나 형이상학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셋째, 우리 사회학은 세계성과 독자성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학문은 범세계화하고 있다. 이론 · 방법론 · 방법에 관련된 논의의 기준과 평가는 세계라는 맥락에서 가늠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학문은 어차피 세계라는 무대 위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사회학은 폐쇄적 학문이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한 나라의 사회학에 한정되거나 어느 한 흐름에 고착되지 않고, 여러 나라의 사회학과 여러 흐름 모두에 대하여 범세계적인 관심과 개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학은 모든 흐름에 대하여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사회학은 모름지기 ‘우리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비판적인 눈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에 대한 우리다운 눈은 비판적 성찰과정을 동반한다. 우리 사회학이 세워야 할 독자성이란 다름아닌 우리 문제에 대한 우리다운 문제제기와 해명을 뜻한다.
세계 속의 우리 사회, 우리 사회 속의 세계에 대한 학문적 표출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학인 것이다. 이론 자체에 대한 연구, 이론과 역사 현실과의 관련성, 세계성과 독자성의 조화, 이러한 과제의 학문적 실천만이 초보적인 도입 · 소개의 수준을 돌파할 수 있게 하고, 오늘날의 정착 · 확산의 조건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