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충청북도 음성에서 출생했다. 1891년 동학(천도교)에 입교했으며,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와 제일고등학교,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했다. 1910년 졸업 후 귀국하여 천도교중앙총부 서계원을 시작으로 대종사, 포덕과주임, 부도령, 대령, 대도정, 고문, 현법사, 상주선도사, 교령 등을 역임했다. 1919년 3·1운동을 앞두고 손병희의 측근이 되어 3·1운동 준비에 참여했으며, 이후에는 천도교의 운영과 사후 수습 등에 노력했다. 같은 해 5월 의친왕(義親王)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 한 대동단사건(大同團事件)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1920년 신숙을 천도교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하고 군자금을 조달, 제공하기도 했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교감으로 취임했으며, 1922년에는 이사로 재직했다. 1921년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 1930년 조선농민사 고문, 1934년 친일단체인 시중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천도교인의 친일협력을 촉구하는 강연을 하고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다. 1943년 8월에는 천도교 대표로 직접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에 징병제 실시 감사 헌금 500원을 전달했다.
해방 후 천도교중앙총부의 전국대회 준비위원회 교약 기초위원, 천도교중앙총부 장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준비위원회 부회장, 남조선과도입법 관선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1951년 3월 13일 사망했다.
정광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875∼90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196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가, 1996년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