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군정기 ()

미 육군사령부 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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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개념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의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했던 기간.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미소군정기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의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했던 기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한반도를 패전국과 같은 분할점령지역으로 설정하여,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서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국내에서는 하나의 독립국가 건설을 놓고 여러 견해가 치열하게 충돌했고, 미국과 소련도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수차례 협상을 진행했지만, 모든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남과 북에 각기 다른 정권이 수립되면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정의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의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기 통치했던 기간.
개설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전반에 걸쳐 억압과 수탈을 당했던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광복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 광복이 곧 식민지기에 변질된 사회상의 원상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광복을 맞은 우리 국민에게는 식민지시기의 질곡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가 부여되어 있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광복을 전취한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힘에 의해 광복을 맞았다. 국내외 독립운동이 전승 연합국 측에 의해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은 연합국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으로 광복을 맞게 되었다. 해방 직후 한국의 정치세력은 좌 · 우익을 막론하고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그리고 장차 진주할 미군을 해방군으로 규정하고 환영했다. 또 소련에 대해서도 한국인들은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하여 마련한 일련의 정책은 해방군이라기보다는 점령군의 입장에서 작성되었다. 이것은 미 · 소 양국이 한국을 일본이나 독일과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과 동일시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한국과 미 · 소 양국의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진주 당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과 미국 정부가 주도한 전후처리 구상에서 기인한다. 루스벨트는 전후 탄생하게 될 한국을 포함한 신생독립국가들에 대하여 신탁통치를 적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신생독립국가들이 자치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여기에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상황이 변하였고,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 증대를 견제할 수 있는 뚜렷한 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소련의 경우도 일본의 패전 이후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그들의 영향력 확대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리하여 미 · 소의 전후 대외전략의 일종의 타협선으로서 한반도에 38°선이 설정되었고, 그 후 남과 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광복을 맞는 우리의 인식과 전후 세계 재편에 대한 미 · 소의 인식은 이와 같이 서로 상이한 시각과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 전체에 대한 미소의 전략적 인식은 한국인의 새로운 국가건설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미 · 소 양국과 한국인 사이의 인식의 괴리는 미 · 소 양군이 한국에 진주하여 전개한 정책들이 한국인의 의사와 상충하며 시행착오를 겪게 하는 기본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남한에서의 미군정

미군정체제의 형성

1945년 9월 9일 주한 미육군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조선총독으로부터 정식으로 항복문서를 접수하였다. 이어 9월 12일 하지 중장은 아놀드(A. V. Arnold) 소장을 군정장관에 임명한 뒤, 20일 군정청의 성격 · 임무 · 기구 및 국 · 과장급 인사를 발표함으로써 남한에 본격적인 미군정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 뒤 군정당국은 10월 5일 김성수(金性洙) 등 11명의 한국인을 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하였다가, 같은 해 12월 군정청의 각 국장에 미국인과 한국인 각 1인씩을 임명하는 2인국장제를 실시하면서 한국인고문제는 폐지하였다.

1946년 3월 29일 법령 제64호로 국을 부로 개편하면서 군정청의 행정편제가 확정되었다. 그 내용은 군정장관 산하에 문교부 · 재무부 · 사법부 등 11개 부와 인사행정처 · 물가행정처 등 5개 처를 두는 것이었다. 이 체제에서 군정장관은 과거에 총독이 가졌던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각 부 · 처장은 그의 각료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각 부 · 처장의 업무와 미군정장관의 활동을 중간에서 조정하는 기구로서 민정장관이 있었다. 따라서 행정권이 한국인에게 이양되기 전에는 미군정장관을 수석으로 하고 미국인 각료들로 구성된 일단의 미국인 기구와, 민정장관을 수석으로 하고 한국인 각료들로 구성된 행정기구가 공존하였다. 그리고 그 밑에 행정 · 사법 · 입법의 삼권이 통합되어 있었다. 다만 군점령재판소 관할 이외의 일반 법원 재판의 독립성은 대체로 보장되었다.

1947년 6월 3일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되자 행정권이 한국인에게 인계되었다. 즉 각 부 · 처장 자리에는 한국인 1인만이 임명되었고, 미국인은 고문의 자격을 가지고 행정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실권은 여전히 그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행정권의 측면에서 볼 때, 미군정기는 미군정 당국이 모든 행정권을 장악하였던 1945년 9월 9일부터 1947년 6월 2일까지의 전반기와 형식적으로나마 한국인에게 행정권이 이양된 1947년 6월 3일부터 1948년 7월 12일까지의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점진적인 과정을 통하여 미군정은 장차 수립될 한민족의 독립정부에 통치권을 이양해가는 과도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미군정체제에서 입법기구의 효시는 1946년 2월 14일에 개원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들 수 있다. 이 기관은 미군 자문기관으로서 이승만(李承晩)과 임정요인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는데, 그 성립경과는 다음과 같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발표를 계기로 국내 정국은 반탁운동의 격동에 휩쓸렸다. 임정측과 인민공화국측은 합작을 위한 행동통일을 시도하였으나 결실은 보지 못하였다.

이에 김구(金九) 등 임정요인들은 1946년 2월 1일 임정 주도하의 자주적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공산당을 제외한 각 정당의 대표로 구성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 그 밑에 최고정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이승만 · 김구 · 김규식(金奎植) 등 28인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 뒤 최고정무위원회는 같은 해 2월 14일 미군정 자문기구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개편되었다. 그 산하에 임정수립 예비방안연구위원회 등 10개 분과를 설치하고 경제전문위원회와 민주대책의회를 구성하여 계획경제에 입각한 균등사회 건설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계기로 반탁운동을 주도한 우익진영의 입장이 미묘해지면서, 이승만이 의장직을 사퇴한 뒤 실질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 뒤 과도정부의 새로운 입법기관으로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창설되었다. 이 기관은 1946년 8월 24일자 군정법령 제118호에 의하여 공포되고 12월 12일에 개원되었다. 그 목적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의거한 통일임시한국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 · 경제 · 사회 개혁에 적용될 법안을 군정장관에게 제안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입법의원은 군정장관의 동의서명이 있어야만 그 의결사항이 효력을 얻는 자문기관에 불과하였다. 1948년 5월 19일 해산될 때까지 군정장관의 승인을 얻어 제정, 공포한 법률은 「하곡수집령」과 「공노제폐지령(公奴制廢止令)」등 모두 12건에 불과하였다.

입법의원의 의원은 관선 45명과 민선 45명의 총계 90명으로 이 중 관선의원은 좌우합작위원회의 심사위원이 심사한 뒤 하지 중장이 최종 결정한 좌우합작위원회 · 정당 · 사회단체의 중간파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민선의원은 호주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한 선거제에 의해서 간접선거로 선출되었는데, 도별 정원은 서울특별시 3명, 충청북도 3명, 경상북도 7명, 전라북도 4명, 강원도 3명, 경기도 6명, 충청남도 5명, 경상남도 6명, 전라남도 6명, 제주도 2명이었으며, 정당별로는 한민당 18명, 독립촉성국민회 11명, 한독당 4명, 무소속 12명이었다.

한편 1948년 5월 4일 군정법령 제192호에 의하여 재판소 조직관련법이 제정, 공포되어, 사법행정권은 군정청 사법부장에게서 대법원 · 고등법원 · 지방법원 및 간이법원으로 구성된 법원으로 이관되어 재판권의 독립이 확보되었다. 미군정체제에서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발족과 재판소의 독립은 곧 제한된 삼권분립체제의 형성을 의미하였으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위한 기초작업이기도 하였다.

이후 1948년 6월 10일의 「국회법」 제정과 1948년 7월 17일의 「대한민국헌법」 공포 및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에 이어 1948년 9월 13일 한미간의 행정권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미군정체제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미군정하의 정당활동

광복 후, 그 동안 억눌려 왔던 한국민들의 정치참여 욕구는 일시에 분출되어 전국 도처에서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이에 미군정 당국은 1946년 2월 23일자 군정법령 제55호를 통하여 정당활동에 대한 규제방안을 강구하였다. 이 법령에서 미군정 당국은 모든 정당은 군정 당국에 등록할 것, 정당사무소는 일정한 위치에 고정시킬 것, 정당은 명칭을 보유할 것, 회계 내용을 군정 관서에 제출할 것, 당원의 자격을 규정할 것 등을 요구하여 정당활동에 대한 간접적 규제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등록정당 수는 급증하여 1945년 말 54개, 1946년 6월 107개, 1949년 5월 344개 당에 이르렀다. 각 정당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점차 정치적 노선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는데, 대략 극우 · 온건우익 · 중간파 · 온건좌익 · 극좌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극우노선의 대표 정당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좌경 독주경향에 대항할 목적으로 민족진영의 지도자들이 세력을 집결하여 조직한 정당이다. 형성과정을 보면, 1945년 8월 18일 원세훈(元世勳)이 발기한 고려민주당(高麗民主黨)을 모체로 김병로(金炳魯) · 백관수(白寬洙) 등이 합작하여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을 발족시켰다.

그런 뒤 여기에 백남훈(白南薰) · 윤보선(尹潽善) 등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송진우(宋鎭禹) · 서상일(徐相日) 등의 국민대회준비회(國民大會準備會), 이인(李仁) · 조병옥(趙炳玉) 등의 충칭(重慶)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등이 가세하여 국내 민족진영 지도자들이 총망라된 단일정당으로서 1945년 9월 16일에 결성되었다.

한민당은 결성 직후 당 발기회의 결의로 인민공화국 타도와 충칭임시정부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여 정치노선을 천명하였다. 한민당의 성격은 그 지도층의 사회배경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민당의 지도층은 주로 호남 재벌을 중심으로 한 지주 · 기업인 · 관료들로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미군정의 요직까지 차지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도층의 이러한 출신성분으로 말미암아 한민당은 오히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그 세력기반 형성에 있어서 좌익에 대항하는 반공산세력을 무차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관료 출신 등이 집결되어 친일정당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특히 좌익계 인사들은 한민당을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집단이라고 혹평하였고, 한민당은 이에 대하여 공산당을 광신적인 파괴분자집단이라고 응수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을 전후해서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자 한민당은 이에 적극 가담하고 나서면서 임정계와도 결별하였다. 한민당의 이러한 보수적 · 수구적인 한계는 토지정책이나 반민특위사건 등의 처리과정에서 특히 잘 드러나고 있다. 한민당과 함께 이승만을 강력하게 지지한 극우 국민운동 조직으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있다.

이승만의 환국을 계기로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는 국내 200여 개의 정당 · 정치단체의 지도자들이 1945년 10월 25일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였는데, 1946년 2월 8일 여타 반공단체와 우익정당들이 이에 가세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다. 이 국민회는 이승만의 정치노선을 지지 · 추종하는 정치조직 연합체에 불과하였으나, 이후 자유당(自由黨) 조직의 모체가 되었다.

이 밖에 이승만을 권좌에 올려놓는 데 전위부대 노릇을 한 대표적인 우익청년단체로 서북청년회 · 전국학생연맹 · 대동청년단 · 민족청년단 등이 있다. 서북청년회는 공산치하의 북한에서 탈출해 온 격렬한 반공청년들의 조직체였고, 전국학생연맹은 주로 학원가에서 반공투쟁을 감행한 학생운동의 전위대였다. 대동청년단과 민족청년단은 반공운동에 동원된 청년행동대 연합체로서 각기 전국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청년단체들은 군정하에서 조병옥 · 장택상(張澤相)이 이끄는 경찰조직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았다.

미군정하의 대표적인 온건우익 정당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들 수 있다. 한독당은 본래 중국 상해(上海)에서 1930년 1월 25일에 결성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축을 형성하면서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의 독립운동 세력을 흡수, 확장하여 왔다. 환국 후 1946년 4월 18일 국민당(國民黨) ·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과 합작하여 그 대중적 기반을 강화하였다.

김구 · 김규식 · 조소앙(趙素昻) 등을 중심으로 한 한독당 지도자들은 순수한 민족주의자들로서 항일투쟁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해방 후 좌우 분열이 심해지자 김규식은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하기도 하였으며, 김구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이 조국을 영구분단 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완강히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

한독당의 정강정책은 그 중진이론가인 조소앙이 기초한 것으로서, 그의 삼균주의(三均主義)는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그리고 교육기회의 균등을 제창한 독창적인 이론이었다.

해방 후 좌우익 사이에서 중간노선을 견지한 중간파 정당으로는 국민당 · 인민연맹 · 국민자유연맹 등이 있었다. 국민당은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하여 여운형과 협력했던 안재홍(安在鴻)이 건국준비위원회의 좌우 분열을 계기로 탈퇴하여 9월 1일 발족시킨 조선국민당이 모태였다.

그 뒤에 기독교계의 박용의(朴容義)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과 명제세(明濟世)를 중심으로 조직된 민중공화당(民衆共和黨), 그리고 자유당협찬동지회 · 근우동맹 등 6개 정당 · 사회단체가 합동하여 1945년 9월 24일 국민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충칭임시정부의 지지와 계급 독재 지양을 표방하고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세웠다. 국민당은 온건한 진보적 민족주의정당을 지향하였으나 지지기반이 명확하지 못하고 미약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1946년 4월 한독당에 흡수, 통합되었다.

온건좌익노선의 정당 운동은 여운형이 중심이 되었다. 그는 일제 식민지시기 국내외에 걸친 독립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특히 지식인층과 젊은 세대 사이에서 명성이 드높았던 대중 정치인으로 중도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다.

광복과 동시에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모체로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급조, 선포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에 의해서 그 조직이 무너지자 여운형은 그와 정치노선을 같이하는 정치인과 여러 단체를 규합하여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였다.

1946년 8월 조선인민당이 박헌영(朴憲永) 중심의 남로당에 흡수된 뒤 여운형과 그의 지지세력은 장안파 출신 이영(李英)이 이끄는 사회노동당과 합작하여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다.

근로인민당은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백남운(白南雲) · 이영 · 장건상(張健相) 등을 지도자로 선출하고 온건좌익노선을 추구하였으나 여운형의 피살을 계기로 구심점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사회노동당계 간부를 비롯한 일부세력은 북한의 공산정권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인민당계의 일부세력은 남한에 잔류하여 혁신세력을 이루었다.

좌익정당인 조선공산당은 러시아공산혁명의 영향과 1919년에 창립된 코민테른의 공작으로 1925년에 창당되었다. 그 뒤 지도층간의 파벌과 일제탄압으로 분열과 붕괴를 거듭하다가 광복을 계기로 다시금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 한국공산주의운동은 그 주도권을 놓고 이영 등의 장안파(長安派)와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再建派)가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나, 결국 재건파가 승리하여 1945년 9월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특히 남한지역의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 조선인민당과 신민당 및 그 밖의 좌익인사들을 흡수,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을 결성하였다. 남로당은 박헌영의 주도 아래 교조주의적 공산혁명을 주창하며 활발한 정당활동을 전개하다가 1947년 8월 미군정 당국에 의하여 정당활동이 불법이 되면서부터는 지하활동에 들어갔다. 남북협상을 전후하여 박헌영 등의 간부들은 월북하여 북한의 정권수립에 참여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정부수립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에 대하여 우익의 반탁과 좌익의 찬탁으로 국론이 분열된 가운데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군측 수석위원은 아놀드 소장, 소련측 수석위원은 스티코프(T. E. Shtikov) 중장이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5월 1일까지 7차례에 걸친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상호간의 이견만을 확인한 뒤, 같은 해 5월 8일 결렬되고 말았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반탁의 우익진영 정당 · 사회단체를 놓고 소련측이 이들을 협의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주장한 데 대하여, 미국측은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여 서로 대립하면서 비롯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무기휴회로 들어가자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한민당 등 일부 극우세력이 가담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 국무부는 좌우합작에 의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원하였기 때문에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다.

7월 22일 합작운동의 대표자들이 선임되었는데, 우파대표는 김규식 · 원세훈 · 안재홍 · 최동호(崔東晧) · 김붕준(金朋濬), 좌파대표는 여운형 · 허헌(許憲) · 김원봉(金元鳳) · 백남운 · 이강국(李康國) 등이었다.

이는 극좌와 극우를 배제하고 중간세력을 육성하여 장차 새 정부의 핵심세력이 되게 하려는 미군정의 기본방침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러한 좌우합작의 원칙에 의거하여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이 공표되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개원된 뒤 좌우합작위원회의 소속 위원들은 대부분 관선의원으로 입법의원에 참여하여 입법의원 내부에 합작세력이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극우와 극좌 세력 사이에서 제3의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당시 남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승만과 한민당 등 극우 정치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겪다가 합작위원회 좌익측 주석이었던 여운형의 피살을 계기로 점차 쇠퇴해갔다.

1947년 4월 미 국무장관 마샬(G. C. Marshall)과 소련 외상 몰로토프(V. M. Molotov) 간에 한국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여 같은 해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의 피살사건과 소련측의 계속적인 비타협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모처럼 속개된 공위는 다시금 결렬되었다.

여운형이 죽자 합작위원회는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여 민족의 자주노선을 지향하는 사회단체와 정치인을 재규합하여 확장된 중간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즉 이 위원회는 미소공위대책협의회 · 민주주의독립전선 · 시국대책협의회 등과 통합하여 1947년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을 결성하였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을 계기로 이승만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이 득세하는 가운데, 남한의 정계는 8월 11일부터 대대적인 좌익계 검거선풍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검거사건을 놓고 미소 양측은 서로 상대방의 태도를 비난하는 공방을 벌였지만, 결국 한국문제는 미국측의 의도대로 국제연합(UN) 총회로 이관되었다. 한국문제의 국제연합 이관은 곧 미국 정부가 이승만 노선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11월 14일 열린 국제연합 총회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나라들이 퇴장한 가운데 한국문제가 논의되었다. 여기서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며 정부의 수립과 미소 양군의 철수를 위한 감시 및 협의기구로 국제연합 임시위원단을 구성, 파견한다는 내용의 미국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단의 입북이 소련에 의하여 좌절되자 다음해 2월 16일에 개최된 국제연합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 내의 총선거 실시 권한을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에 부여하였다.

국제연합 소총회의 결정이 전해지자 김구 · 김규식 등은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들은 조소앙 · 김창숙(金昌淑) · 조완구(趙琬九) · 홍명희(洪命憙) · 조성환(曺成煥) 등과 빈번한 회동 끝에 3월 11일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한 남북협상안을 발표하고, 4월 19일 북행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이들의 노력은 결국 무산되어 북한측의 선전에 이용되는 결과만을 낳았다.

1948년 5월 10일 국제연합 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소집되었다. 제헌국회는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申翼熙) · 김동원(金東元)을 선출한 뒤 헌법안을 작성, 통과시키고, 7월 17일 이를 공포하였다. 7월 20일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李始榮)이 선출되어 정부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 내외에 선포되었다.

북한에서의 소군정

소군정체제의 형성

1945년 8월 9일 종전을 며칠 앞두고 대일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은 다음날인 10일부터 북한으로 진주하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이미 일본의 패전이 완연하던 때여서 소련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북한을 점령할 수 있었다. 24일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 M. Chistiakov) 대장이 선발대를 거느리고 평양에 진주하였다.

북한 전 지역의 장악에 성공한 소련군 사령부는 같은 해 10월 12일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 ·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 · 「소련 제25군 사령관의 명령」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는 소련군이 북한주민들의 문화활동의 자유와 사유자본 및 개인기업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선언은 허구적 기만에 불과함이 곧 드러났다. 예컨대 소련은 광복되던 해부터 북한산 쌀을 가져갔고, 수풍발전시설 · 흥남비료공장 등의 시설을 접수하였으며, 모든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뒤이어 나온 소련군 사령부의 게시문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에서는 “소련은 조선을 공산사회화할 목적으로 북한에 진주한 것은 아님”을 표명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의 점령정책은 본질적으로 점령지역에 소련에 우호적인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으며, 북한 점령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소련 제25군 사령관의 명령」에서 모든 정당과 단체의 등록제와 무장부대의 해산 및 보안대의 조직을 명령함으로써, 공산주의를 기초로 한 반미 · 친소 경향의 지배체제를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는 제25군 사령부, 즉 북한 점령 소련군 최고사령부와는 별도로 세칭 ‘로마넨코 정치사령부’로 불리는 ‘민정부’가 있었다. 민정부는 정당의 조직활동 및 5도행정국과 각도 임시정치위원회의 제반 활동을 지도하였으며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였다.

민정부에는 교통 · 체신 · 산업경제 · 농림 · 재정 · 신문방송 · 학교교육 및 정당과 기타 단체를 담당하는 행정부서들이 체계적으로 편제되어 북한 통치를 주도하였다.

해방 직후 북한 각 지방에는 자치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소련점령군은 북한에 진주한 뒤 각 도의 자치위원회를 임시정치위원회로 개칭할 것을 명령하고, 이 임시정치위원회로 하여금 각 도의 치안유지와 일제의 행정권 접수를 담당하게 하였다. 1945년 10월 8일 이북5도 대표가 회동하여 5도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민족파 15명, 공산파 15명 등 총 30명의 위원을 선임하고 위원장에 조만식(曺晩植)을 선출하였다.

그 뒤 이 위원회는 소련군 사령부의 승인하에 북조선 5도행정국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이 5도행정국은 산업 · 교통 · 농림 · 상업 · 재정 · 체신 · 보안 · 사법 · 교육 · 보건 등의 10국으로 구성되었는데, 소련 군정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는 비교적 자생적인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소련군정 당국은 면밀한 계획 아래 1946년 2월 5일 ‘북조선 각도 · 군인민대표와 반일 민주정당 및 사회단체 회의’를 소집하고 이 회의에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위원회의 간부로는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두봉(金枓奉), 서기장 강양욱(康良煜)이 임명되었고, 그 밖에 14개 부서의 국장이 임명되었다. 이 조직은 사실상 공산당 독점 정권으로, 공산당 외에도 민주당 인사와 무소속 인사가 2인씩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들이 공산당의 독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임시인민위원회가 오늘날 북한 정권의 모체가 되었다.

1946년 11월 3일 도 · 시 · 군 인민위원회 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다음해 1947년 2월 17일 도 · 시 · 군 인민위원 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최고입법기관으로 북조선인민회의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1947년 2월 21일 개최된 제1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는 상임위원회의 간부 임원으로 위원장 김두봉, 부위원장 최용건(崔庸健) · 김달현(金達鉉), 서기장 강양욱을 선출하고, 아울러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내각 구성원으로서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책 · 홍기주(洪箕疇) 외 15국의 부장을 선출하였다.

최고입법기관과 정권기구가 완비된 뒤 같은 해 2월 24∼25일의 동(리)인민위원회 선거와 3월 5일의 면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됨으로써, 북한은 ‘민주선거방식에 의한 인민정권형태’를 하부 말단에 이르기까지 완성하였다.

소군정하의 정당활동

광복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공산당은 북한지역에서 일관된 지도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즉 함흥 · 흥남 지역은 박헌영계의 오기섭(吳琪燮) · 주영하(朱寧河)가 장악한 반면, 원산지역은 이주하(李舟河), 청진은 김채룡(金采龍), 평양은 현준혁(玄俊爀)이 중심이 되어 각기 당조직을 정비하는 등 지방에 따라 난맥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소련파연안파(延安派)의 공산당세력이 북한으로 들어왔다.

연안파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항일투쟁에 동참하였던 한국인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옌안(延安)에 집결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들로 하여금 조선의용군을 조직케 하였고, 그들의 북한행을 지원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는 각기 이해관계가 다른 국내파 · 소련파 · 연안파, 그리고 김일성이 중심이 된 항일무장투쟁세력의 4개 공산당세력이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해방 이후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1국 1당 원칙을 고수하여 북한만의 공산당 결성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이들은 박헌영을 지도자로 하는 서울의 재건조선공산당을 정통파 조선공산당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그 산하의 북한지역 도당(道黨) 조직임을 자처하였다.

하지만 1945년 10월 개최된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는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북한 지역의 주도권이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실상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투쟁세력에게 넘어갔음을 의미하였다. 서북5도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이른바 ‘민주기지’ 노선을 펼쳐서 북조선 분국의 설치를 합리화하였다.

김일성은 1945년 12월 17∼18일 개최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제3차 확대간부회의에서 분국책임자인 제1비서로 선출되었고, 연안파의 무정(武亭)과 국내파의 오기섭이 제2비서로 선출되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 등은 북한에 완전히 독립된 당중앙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할 것을 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오기섭 등 국내파는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소련 군정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 일파가 결국 승리하였다.

북한지역의 공산당 중앙조직을 설치하는 데 성공한 김일성의 항일무투파, 소련파 및 연안파가 당의 인사권을 좌우하면서 국내파는 차차 거세되었다.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오기섭은 선전부장으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연안파의 무정은 같은 해 7월 보안간부 총훈련소의 포병부사령관으로 밀려났고, 소련파는 점차 북한사회 내에서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김두봉 · 최창익(崔昌益) · 한빈(韓斌) 등의 연안파 지도자들은 세력 만회를 위하여 지방조직 건설에 착수하였다. 1946년 3월 30일 조선독립동맹의 후신인 신민당이 창설되어 위원장에 김두봉, 부위원장에 최창익 · 한빈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주로 소시민 · 인텔리 · 중산계급 등을 대상으로 하여 당세를 확장해갔다.

신민당의 당세가 점차 확대되어 가자 소련파 중심의 공산당은 합작을 모색하여, 결국 1946년 8월 28∼30일 평양에서 양당의 합동대회가 개최되어 북조선노동당의 명칭으로 통합되었다. 그 당시 양당의 당원수는 모두 45만 명에 이르렀다.

이 합작과정에서 노동당 중앙위원장을 김일성으로 할 것인가 또는 김두봉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소련군의 정책과 관련해서 관심의 초점이었다. 결국 김두봉이 초대위원장이 되고 김일성은 부위원장으로 낙착되었다. 또한 이 대회에서는 주영하가 국내파를 대표해서 부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주영하가 북로당의 초대 2인 부위원장의 한 사람으로 중용된 것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주영하는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을 계기로 종파주의자로 낙인 찍혀 당지도부에서 밀려났다.

1948년 3월에 개최된 북조선노동당 제2차 대회는, 시기적으로 보아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된 반면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주도권이 확립된 시기에 해당된다. 이 제2차 대회를 계기로 오기섭을 비롯한 김일성의 많은 정적들이 단죄 또는 강등 배치 형식으로 당의 지도층으로부터 밀려났다. 또한 당내 사상교화작업이 강행되는 동시에 적극분자와 열성분자의 세포조직을 중심으로 조직 강화작업이 촉진되었다.

한편 남북협상을 앞두고 비공산당계의 민주당 · 청우당 등과의 전술적인 유대가 모색되기도 하였다. 당시 민주당과 청우당은 당명만 달리할 뿐 실제로는 공산당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1945년 11월 3일에 창립된 북조선민주당은 1946년 1월 초 당수 조만식이 소련 군정에 의해서 감금됨으로써 창당이념이 변질되었다.

북조선민주당의 창당 간부들은 북한을 탈출하여 남하하였고, 그 뒤 최용건을 당수로 하여 공산당 추종세력들이 지도부를 장악하였다. 1946년 2월 8일 창립된 천도교청우당은 천도교 지도자인 당수 김달현의 지도하에서 한동안 소련군의 ‘선도’를 받아오다가 1948년 봄 천도교인에 대한 대대적 체포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공산당에 예속되었다.

이 밖에도 당시 북한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사회단체들로 조선직업총동맹 · 조선농민동맹 · 조선민주청년동맹 · 조선민주여성동맹 등이 존재하였고, 1948년 남북협상 때는 근로인민당 · 인민공화당 · 민주독립당 · 민중동맹 · 조선건민회 등이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

북한정권의 수립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소련 정부는 남북한에서 외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한국인 자신의 손으로 통일정부를 세우도록 할 것을 제안하는 각서를 미국 정부에 보냈다. 북한 정권은 또 남한의 김구, 김규식이 제안한 남북 지도자 회담에 대한 역제안으로 1948년 4월 14일 남과 북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평양에서 남북 정치협상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의에 호응하여 김구와 김규식 등 남한의 민족주의계열과 중도계 인사 및 좌익 인사들이 4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하였고, 이 회의에서 5 · 10단선 반대, 외국군 철수, 한국인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등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국제연합 감시하의 5 · 10선거가 단행되자 평양에서는 다시 남북 제정당 및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속개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남북대표자들은 조선중앙 정부와 조선최고인민회의를 결의함으로써 두 차례에 걸친 남북 연석회의는 막을 내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북한은 1948년 8월 25일 북한지역의 선거를 실시, 북한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한반도의 남북분단은 고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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