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소해(宵海). 경상북도 칠곡 출신. 좌천재(佐川齋)에서 한문을 배운 뒤 육영재(育英齋)에서 12년간 신학문을 공부하고, 게일(Gale,J.S.) 목사에게 영어를 배웠다.
1905년 동경(東京)으로 가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미국 공사관 무관인 이스트 레이크 밑에서 군사훈련을 받다 발각되어 퇴학당한 뒤 미국으로 갔다. 게일 목사의 추천으로 1908년 발프레스 예비학교를 거쳐 인디애나주립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대학 졸업 뒤 항일투쟁에 직접 투신하려고 1917년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외무차장이 되었다. 1921년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대회에 참석, 정치부위원으로 선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3인터내셔널 3차대회에 참석, 레닌과 만났다. 이를 계기로 코민테른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사이의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1922년 극동인민대표대회의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하고 김성숙(金星淑) 등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혁명』지를 간행하였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잡혔다가 북경신문이 옹호해 줘 석방되었다. 상해에서 의열단(義烈團)으로 활동하며 국내로 폭탄을 들여보내다가 잡혀서 국내로 압송되었으나, 증거가 없어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다시 상해로 돌아가 1941년 임시정부의정원의원, 1942년 학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광복 후 귀국하여 여운형(呂運亨)계의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1950년 5·30선거에서는 부산에서 출마, 옥중에서 전국 2위의 최다 득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뒤에도 혁신적인 정치 세력으로 남아 당국의 주목을 받던 중 간첩 박정호(朴正鎬)사건과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5·16 이후 혁신당(革新黨)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노령 등의 이유로 석방된 뒤 정릉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장지는 서울 근교에 있는 신세계공원묘지이다.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