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

원세훈
원세훈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독립단, 철혈광복단, 대한국민의회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고려민주당, 한국민주당 등을 창당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춘곡(春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7년(고종 24)
사망 연도
1959년
출생지
함경남도 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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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원세훈은 해방 이후 국회의원,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함남 정평 출생으로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동만주로 망명하였다. 간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북경 등에서 조국광복 대의 설파, 새로운 독립운동기관 창설 등을 통해 일제와 맞섰다.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납북당했으며,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독립단, 철혈광복단, 대한국민의회 등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고려민주당, 한국민주당 등을 창당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개설

아호는 춘곡(春谷). 함경남도 정평 출생. 아버지는 도경(道京)이다.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동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 등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고려민주당 · 조선민족당 등을 창당하였으며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여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2세 때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6년 3월 서울에 올라와서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수학 중 이동휘(李東輝) · 이상설(李相卨) · 안창호(安昌浩) 등과 청년지도를 하였으며 1911년에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 활동하였다. 졸업을 3개월 앞두고 일본경찰에 잡혔다가 5개월 만에 가석방되었으며, 곧이어 동만주로 망명을 하였다.

망명 후 간도 모록구(母鹿溝)에서 모록의숙을 설립하고 청년들에게 조국광복의 대의를 가르치면서 활동을 하던 중 1914년 1월 간도 일본영사관으로부터의 체포령을 피하여 길림(吉林) · 톈진(天津) · 북경(北京) · 칭다오(靑島) 등지를 전전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북만주 목릉현으로 돌아가 안태훈(安泰勳) · 박무림(朴茂林) · 안공근(安恭根) 등과 활동하였으며, 1915년 5월에 러시아령 니콜라예프스크로 가서 이상설 · 이동휘 · 이동녕(李東寧) · 이갑(李甲) 등과 광복 대업을 협의하고 이 해 10월 노령 한인교육기관의 효시인 대동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 훈련을 하는 한편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하였다.

1917년 이동휘 · 문창범(文昌範) · 윤해(尹海) · 고창일(高昌一) 등과 함께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상임위원 및 재정부장에 취임하였으며, 1919년 2월에는 노령에서 한인의 자치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개칭,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2월 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한편, 윤해 · 고창일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노령한족대표로 참석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관을 창설하자는 창조파에 가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맞서 국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해 8월 김규식(金奎植) · 박용만(朴容萬) · 신숙(申肅) · · 윤해 등 70여 명과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3월 소련당국에 의하여 추방을 당하고 칭다오를 거쳐 북경으로 향하였다.

1924년 이후는 베이징대학 노문과에 학적을 두고 동지들과 연락하면서 독립당조직 준비를 하였다. 1926년 8월과 9월에 베이징에서 안창호와 수차례 만나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를 결성하기도 했다. 1927년 일본경찰에 잡힌 신채호(申采浩) 외 5인동지 구출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을 하고 서울로 돌아와 몇 차례 국외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중앙시보』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교육협회 유진태(兪鎭泰)와 함께 계몽운동을 하는 한편 잡지를 통하여 총독정치를 비판하면서 일제와 맞섰다.

59세가 되던 해 광복을 맞아 경기도 평택시 안중 은거지에서 올라와 고려민주당을 발기하고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국민대회준비회를 만들어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민족진영 단결을 위하여 고려민주당을 해체하고 조선민족당을 거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총무에 취임하였다. 1946년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 ·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 · 민중동맹대표 등을 지냈으며, 그 뒤 한국민주당을 이탈하였다.

1947년 조선농민당을 창당하여 당수에 취임하였고, 김규식이 이끌던 민족자주연맹의 정치위원 등으로 중간노선을 지향하고 민족자주운동에 앞장섰으며,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석하였다. 1950년 5월 서울 중구에서 민족자주연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 · 25전쟁이 일어나 북한으로 납치당하였다. 북한에서는 1956년 7월 북한당국의 종용으로 납북인사들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상무위원이 되었다. 1959년 간첩죄로 숙청당해 같은 해 12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상훈 및 추모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김재명, 선인, 2003)
『시베리아의 투사: 원세훈(元世勳)』(송남헌, 천산산맥, 1990)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이강훈, 서문당, 1977)
『나의 일생(一生)』(신숙, 일신사, 1963)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http://kwari.org/index.php)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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