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
3 · 1 운동과 동시에 국내외에서 공화정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났다. 임시정부 수립 운동은 3 · 1 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돌출적 운동이 아니었다. 임시정부 수립 운동은 대한제국이 망할 무렵부터 일어났다.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자에서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외국에 나온 조선 민족을 무형한 국가와 무형한 정부 산하로 통합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정치적 구역을 나누어 행정기관을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또한, 무형국가를 이끄는 무형 정부, 즉 임시정부의 역할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부에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
박용만의 무형국가론을 지지하는 여론이 확산하는 가운데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스스로 해외 한인을 대표하는 무형의 정부임을 천명하면서 형식상 대한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 민주주의 국가는 이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포괄하는 임시정부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연해주 한인들도 임시정부 수립 운동을 펼쳤다. 권업회는 연해주에서 1911년 12월에 창립한 한인 결사체였다. 권업회는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를 독립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일본이 패전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탄압하면서 좌절하였다.
연해주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을 독립의 기회로 보고 독립 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였다. 1915년 3월 베이징에 본부를 둔 신한혁명당이 결성되었다. 신한혁명당은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중국과 함께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때 일본 공격에 동참하여 독립의 기회를 얻고자 중국 베이징 정부와 밀약을 맺을 계획을 세웠다.
신한혁명당은 베이징 정부와의 교섭 주체로 고종을 상정하고 그를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우선은 성낙형을 국내로 밀파하여 고종에게서 조약 체결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성낙형이 국내에서 체포되고 독일이 패하면서 망명정부 수립 모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1917년 7월 상하이에서는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조소앙 등 14명의 독립 운동가가 해외 한인의 대표자 회의인 민족대동회의를 열어 공화정체의 임시정부를 건설하자는 내용의 「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3 · 1 운동 직전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가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25일에는 니콜리스크에서 러시아, 간도, 국내 등에서 온 약 130명이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이 대회에서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 · 1 운동이 한창인 3월 17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공식 출범하였다.
3 · 1 운동 당시 국내에는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거나 임시정부 안을 담은 전단들이 뿌려졌다. 실제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3 · 1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천도교가 1919년 3월 3일 자로 발행한 『 조선독립신문』은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 대통령을 선거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3 · 1운동을 준비하는 단계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고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는 4월 9일에도 「조선민국임시정부안」이 들어있는 전단이 뿌려졌다.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를 임시정부의 수석인 정도령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부도령에 지명하였다. 4월 17일 경에는 평안북도에서 「 신한민국정부 선언서」라는 전단이 뿌려졌다. 집정관으로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이동휘를 내세운 걸 보아 간도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만든 임시정부 수립안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임시대한공화정부안, 고려임시정부안 등이 국내에서 발표되었다. 한결같이 공화제 정부를 지향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서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3월 중순 이후였다. 4월 2일에는 약 20여 명이 인천 만국공원에서 회의를 열었다. 천도교계, 기독교계, 유교계, 불교계 인사들이 결집하였다. 여기서는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갖고 임시정부를 선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만든 헌법인 「약법」에 따르면 민주제와 대의제에 기반을 둔 임시정부 수립을 지향하였다.
4월 16일 경에는 다시 13도 대표자들이 서울에서 회의를 갖고 임시정부 각료를 선출하였다. 집정관 총재에는 이승만,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4월 23일의 13도 대표자 회의는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학생 조직에 맡겼던 국민대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학생들은 자동차에 ‘국민대회’, ‘공화 만세’ 등의 깃발을 달고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전단을 뿌렸다.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이 준비되었다. 1919년 2월 말 3 · 1 운동을 모의하던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현순 목사를 상하이로 보냈다. 현순이 상하이에 도착한 날은 때마침 3월 1일이었다. 현순은 천도교에서 받은 2,000원을 종잣돈 삼아 프랑스 조계 안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렸다. 3 · 1 운동 소식이 알려지면서 더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상하이를 찾았고 독립임시사무소는 독립운동을 이끌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임시기구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26일과 27일에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 열렸다. 입장은 갈렸다. 빠른 시일에 최고기관을 수립하자는 측과 국내 민족대표 33인의 뜻을 기다려 결정하자는 측이 맞섰다. 결국 다수가 조속한 임시정부 수립에 동의하면서 본격적인 절차가 진행되었다.
먼저 임시의회를 설립하였다.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정부 수립 절차를 마련하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하였다. ‘대한’은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을, ‘민국’은 1912년에 수립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이 의미하는 것처럼 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한다는 결의를 담고 있었다.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이하 임시헌장)이 반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4월 25일에는 임시의정원이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임시의정원은 각 지방 인민의 대표위원으로 조직하고 위원의 자격은 대한 인민으로서 중등교육을 받은 만 23세 이상 남녀로 한정하였다. 의원 수는 인구 30만 명에 각 1인을 선출하는 것으로 하였고, 임기는 2년으로 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3 · 1 운동을 전후하여 수립된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데 나섰다. 국내에서 수립한 한성정부나 신한민국정부는 제대로 활동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인정을 받아 법통성 있는 정부를 해외에 수립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연해주에서 수립한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 앞장선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안창호였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되, 한성정부의 내각 명단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법통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한국민의회의 양대 세력인 문창범계와 이동휘계 중 후자만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통합 임시정부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기로 하였다. 임시의정원은 9월 6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마련하고 한성정부 명단에 따라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내각을 선출하였다.
3 · 1운동의 격랑 속에서 본격화된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그해 9월 상하이에서 통합 임시정부 수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1918년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선임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합 임시정부는 좌우 합작적 성격을 띠면서 출범하였다.
임시정부의 첫 번째 헌법인 「임시헌장」을 기초한 이는 조소앙이었다. 1917년에 발표된 「대동단결선언」 역시 그가 기초하였다. 1919년 3월 11일 중국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 주도 아래 독립 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 대한독립선언서」 역시 조소앙이 작성하였다. 그는 이미 두 선언에서 조선 민족의 주권은 소멸하거나 다른 민족에게 양도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한 바 있었다.
3 · 1 운동이 확산되자 조소앙은 지린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헌법을 기초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조소앙은 임시정부 설립의 정당성을 조선인이 직접 행동으로 주권을 행사한 3 · 1 운동에서 찾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 ‘헌법’인 「임시헌장」을 내놓았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 등을 향유한다. 제5조 대한민국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 제6조 대한민국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를 가진다.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舊)황실을 우대한다. 제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부 폐지한다.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제1조에서는 민주공화제를 선언하고 제2조에서는 대의제를 천명하였다. 제3조의 평등권, 제4조의 자유권, 제5조의 참정권 등은 인민의 기본권에 해당한다. 제6조에는 교육 · 납세 · 병역 등 국민의 의무를 규정하였다. 제9조에서는 사형, 고문과 더불어 공창제와 같은 반인권적인 제도를 없앨 것을 규정하였다. 공창제란 국가가 공인하는 성매매 제도를 말하는데, 일본의 공창제가 식민지화와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간결하지만, 민주주의 국가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빠짐없이 담은 헌법이었다.
임시정부는 해방될 때까지 5차례에 걸쳐 개헌을 실시하였다. 근대 국가의 3요소인 영토, 주권, 인민을 전제로 한 헌법에 기반을 둔 헌정체제를 꾸준히 유지하였다. 헌법이야말로 임시정부의 정당성과 합법성의 원천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헌법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바로 주권 규정이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의 헌법으로 제1차 개헌을 통해 공포한 「대한민국임시헌법」의 제2조에 처음으로 주권 규정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 인민 전체에 있다"는 조항이 그것이다. 그런데 1925년에 제2차 개헌을 통해 공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제3조에는 "대한민국은 광복 운동 중에는 광복 운동자가 전 인민을 대(代)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1927년에 제3차 개헌을 통해 공포한 「대한민국임시약헌」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국권은 인민에게 있음. 광복 완성 전에는 국권이 광복 운동자 전체에 있음"이라 하여 임시정부의 주권이 원칙적으로는 인민에게 있으나, 독립하기 전에는 독립 운동가가 이를 대리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40년 제4차 개헌에 따라 공포한 「대한민국임시약헌」 제1조 역시 "대한민국 국권은 인민에게 있되, 광복 완성 전에는 광복 운동자 전체에 있다"라고 하여 1927년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제5차 개헌에 따라 1944년에 공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4조 또한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 전체에 있음. 국가가 광복되기 전에는 주권이 광복 운동자 전체에 있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8조에서는 광복 이전에 주권을 갖는 광복 운동자가 누구인지도 명확히 하였다. "조국 광복을 유일한 직업으로 인정하고 간단없이 노력하거나 또는 간접이라도 광복 사업에 정력 혹은 물력의 실천 공헌이 있는 자"가 바로 광복 운동자였다. 이처럼 "광복 운동 기간에는 광복 운동에 공헌한 광복 운동자만이 대한민국 전체 인민을 대신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는 조항에는 인민 전체에게 주권이 있음을 전제하면서도 영토와 인민이 부재한 망명정부의 정체성을 반영한 ‘임시’ 헌법으로서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1919년 4월 「임시헌장」에 처음 등장한 민주공화국은 5차례에 걸친 개헌을 거쳐 1948년에 공포한 제헌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규정으로 계승되었다. 주권 재민의 정신은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담겼다. 즉, 임시정부가 존속하였던 동안 민주공화국 이념과 주권 재민의 정신은 헌법의 구성 원리로 확고히 뿌리내렸고 제헌헌법으로 계승되었다.
임시정부 27년은 상하이 시대(19191932년), 이동 시대(19321940년), 충칭 시대(1940~1945년)로 나눌 수 있다.
임시정부는 출범 직후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외교와 군사 활동에 집중하면서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였다. 먼저 연통제를 실시하고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1919년 7월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연통제」를, 8월에 제2호로 「임시지방교통사무국장정」을 제정하였다. 연통제는 내무부에서 관할하는 행정조직망으로 국내의 도는 독판(督辦), 부는 부장(府長), 군은 군감(郡監), 면은 면감(面監)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교통부 산하에 설치한 교통국은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교통 · 통신망이었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비밀 연락원인 특파원을 매개로 운영하였다. 연통제를 제정한 1919년 7월부터 각 도별로, 그리고 철도 연변에 특파원을 파견하였다. 특파원들은 국내 행정조직 책임자에게 임명장을 전달하고 정부의 법령과 공문을 배포하였으며 비밀결사와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선전 활동 등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의 성과로 1919년 말에는 서울에 총판부가 설치되고 평안도 · 함경도 · 황해도 등 북부 지역을 비롯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에 행정망이 조직되었다.
교통국은 상하이와 국내를 연결하는 교통망을 설치하였다. 교통국은 신의주 맞은편에 자리한 중국 안둥(安東)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안둥에서 아일랜드인인 조지 쇼(George Shaw)가 운영하는 무역회사인 이륭양행 2층에 안둥교통사무국을 설치하였다. 안둥교통사무국은 교통부에서 파견된 책임자가 운영하였다. 특파원들은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안둥에 도착하여 안둥교통사무국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갔다. 국내에서는 곳곳에 설치한 비밀연락소를 이용하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연통제, 교통국, 특파원을 통해 추진하던 정보활동을 보다 체계화하기 위한 정보기구 설치를 위해 국무령 제3호로 ‘지방선전부규정’을 제정하였다. 지방선전부는 ‘내외에 있는 국민에 대한 선전 사무를 강구 · 집행하는 비밀기관’으로, 조직은 총판, 부총판, 이사, 선전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선전대원은 ‘ 조선총독부 관리 및 한인 관리의 행동’, ‘일제의 정책’, ‘국내 독립운동 상황’, ‘국민의 민심 동태’ 등을 조사 파악하고 이를 매주 한 번 보고해야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연통제, 교통국, 특파원, 지방선전부를 통한 국내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국내로 파견된 특파원과 선전대원들이 속속 체포되면서 1922년 말에 이르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군사 활동을 주요 목표로 정하였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어서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임시정부는 1919년 말 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군사정책의 핵심은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는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과 연계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군무부를 만주 지역으로 이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연통제와 교통국이 붕괴되면서 자금난으로 군사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만주 일대에서 활약하는 무장 독립군 부대를 산하로 통합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는데, 서간도의 서로군정서, 북간도의 북로군정서, 남만주의 광복군총영 등의 독립군 부대가 임시정부의 간접적인 지휘를 받았으나 그다지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임시정부는 만주에서 직할 군단으로 1920년에 광복군사령부를, 1924년에 육군주만참의부를 편성하였다.
임시정부의 위치가 국제도시이자 프랑스 조계인 상하이에 위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시정부는 출범 때부터 무엇보다 외교 활동을 중시하였다. 먼저 임시정부는 1919년 2월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한 김규식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파리 주재위원으로 임명하여 파리위원부를 설치하였다.
파리위원부는 1919년 9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외교통신부와 함께 구미위원부에 흡수되었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이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설치한 한국위원회를 개편한 것이었다. 이승만 · 김규식 등은 미국무부 당국자들과의 개별 접촉을 통하여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에 대한 후원을 요청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9월에 외교 활동의 일환으로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한 『 한일관계사료집』을 발간하였다. 임시정부는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을 위해 안창호를 총재로 하고 이광수를 주임으로 하는 임시사료편찬회를 구성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는 1919년 7월 초순 활동을 시작하여 8월 하순에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임시정부는 1921년 말에 열릴 예정인 워싱턴 회의와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임시정부는 태평양 지역의 군비 축소 문제를 다루는 워싱턴 회의에 대비한 업무를 구미위원부에 위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는 워싱턴 회의에 거는 기대를 담은 포고문 2호를 발표하였다. 상하이에서는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이 직접 워싱턴 회의에 참석하려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극동인민대표대회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 즉 동북아시아의 피압박 민족 문제를 다룰 목적으로 열렸다. 동북아시아 지역 참석자들은 한국을 비롯하여 9개국 144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 대표가 52명으로 가장 많았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의장단에 포함되었는데 이 대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이를 개량하고 촉진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임시정부는 자신의 활동을 선전하기 위한 기관지인 『 독립』을 창간하였다. 사장 겸 주필은 이광수가 맡았다. 1919년 10월 16일 자 제21호까지 발행한 후 『 독립신문』으로 제호가 바뀌면서 1926년까지 모두 198호가 발행되었다. 1922년 7월부터는 중국인에게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중문판이 발행되었다. 『독립신문』은 임시정부의 기관지를 표방하였으나 편집과 운영에서는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았다.
1920년 12월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대통령에 선출된 지 1년 3개월 만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될 때부터 그해 2월에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낸 ‘위임통치청원’이 논란이 되었던 것처럼 분란의 씨앗을 안고 활동을 시작해야 하였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원만히 진행되지 못하고 불신의 골이 깊어지면서 1921년 1월 국무총리인 이동휘가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학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노백린, 노동국총판 안창호도 연이어 사퇴하였다.
대통령이 부임한 후 혼란이 거듭되자 베이징에 있는 독립 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신채호 · 박용만 · 신숙 등은 1921년 4월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는 불신임안을 결의하였다. 이승만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고 안창호 · 여운형 등은 임시정부의 위기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창하고 나섰다. 결국 이승만이 1921년 5월 상하이를 떠나자 대부분 각료들도 임시정부를 떠났다. 1922년 6월 임시의정원은 대통령과 국무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였으나 취소되었다.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중순까지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중국 관내는 물론 국내, 만주, 연해주, 미주 등에서 온 130여 명이 모였다. 이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법통 문제가 쟁점이었다.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인가(개조파), 아니면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 것인가( 창조파)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던 인물들은 개조파로서 임시정부 개편을 주장하였고, 창조파는 이승만 배척, 임시정부 해체, 새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두 입장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무렵 임시정부는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국민대표회의가 한창이던 1923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들은 시국을 수습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이승만이 수습에 나서 1924년 5월 이동녕을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 개편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임시의정원이 이동녕을 대통령 직무 대리로 임명하자 이승만이 반발하고 이에 이동녕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임시정부는 다시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임시의정원은 박은식을 대통령 대리 및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을 출범시켰다. 박은식 내각이 출범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탄핵이 추진되었다. 1925년 3월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의정원에 제출되어 통과되었다. 그리고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후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하는 개헌을 단행하였다. 이 개헌에 따라 박은식이 사임하고 초대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은 만주 지역 독립 운동가들을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상하이로 부임하지 않았다.
내각 구성조차 못한 이상룡은 사임하였고, 뒤이어 선출된 양기탁과 안창호는 자진 사퇴하였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장이 임시로 국무령을 대리하다가 1926년 홍진이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5개월 만에 다시 홍진이 사임하면서 김구가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1920년대 중반 임시정부 출신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전개하려면 정부보다는 정당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인식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을 추진하였다. 민족유일당운동은 전 민족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운동이었다. 이는 중국 국민당이 당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이당치국’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1926년 5월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촉성회에서 시작되었다. 안창호는 "주의 여하를 막론하고 단합된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대 혁명당을 결성할 것"을 촉구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을 본격화하였다. 홍진은 국무령 취임식에서 전 민족을 망라한 정당을 조직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홍진에 이어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1927년 3월 개헌을 통해 "광복 운동자가 대단결한 당이 완성될 때에는 최고 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고 하여 민족유일당운동을 뒷받침하였다.
민족유일당운동은 각지에서 촉성회를 결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26년 10월 베이징촉성회를 시작으로 1927년 3월 이후 만주를 비롯하여 상하이, 광저우, 우한, 난징 등에서 촉성회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민족유일당운동도 난관에 봉착하였다.
1931년 일본의 조장에 의해 한국인과 중국인의 갈등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진 만보산사건과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하는 만주사변이 잇달아 일어났다.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이 고조되는 가운데 수세에 몰리게 된 임시정부는 의열투쟁에 나섰다.
김구는 청년들을 기반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1932년 1월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은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4월에는 역시 한인애국단원인 윤봉길이 일본군 수뇌를 향해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는 임시정부를 되살렸다.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을 일시에 날려 버렸고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군 30만 명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윤봉길 의거를 격찬하였다. 또한 세계 각국 언론이 윤봉길의 거사를 보도하면서 임시정부의 존재와 활동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지만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2년 5월 일본이 윤봉길 의거의 배후 수색에 나서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급히 상하이를 떠나야 하였다. 임시정부 요인 대부분은 피신하였지만 안창호 등은 체포되었다. 피신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함께 움직이지 못하고 자싱 · 항저우 · 난징 등으로 각자 피신하였고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옮겨졌다.
일단 피신하였던 조소앙 · 김철 등은 1932년 5월 10일 항저우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도 항저우로 이전하였고 가족들도 이주하였다. 일부 국무위원과 김구는 자싱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경찰과 밀정을 풀어 추격하는 바람에 항저우와 자싱에서의 생활은 불안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으로 이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는 난색을 표하며 전장을 제안하였다. 1935년 11월 임시정부는 전장으로 이전하였으나 임시정부 요인 대부분은 난징에 거주하였다. 난징에서 김구는 장제스와 면담을 통해 뤄양군관학교에 한인 청년을 초급 군사 간부로 양성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임시정부는 다시 전장에서 창사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해 오므로 피난을 떠난 것이었다. 난징에서 100여 명이 목선 2척에 나누어 타고 출발하여 창사에 이른 때는 12월이었다. 창사의 생활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내륙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창사도 위험해졌다. 임시정부는 협의 끝에 중국 내륙의 서남쪽 난닝이나 윈난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우선 1938년 7월 기차로 창사를 떠나 광저우로 갔다. 일단 광저우에 임시정부 청사를 두고 난닝이나 윈난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의 이주를 꾀하였다. 세 달 만인 1938년 10월 임시정부는 일본의 폭격을 피해 류저우로 향하였다. 류저우에서는 네 달간 머물렀다. 1939년 4월 류저우를 떠나 한 달 만에 치장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9월에 마침내 치장에서 충칭으로 이주하였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난 후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8년여에 걸친 이동 시대를 거쳤다.
이동 시대에는 정당 통일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에 앞서 1930년을 전후하여 만주에서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이 결성되었고,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 인사들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며 난징에서는 한국혁명당이 결성되었다.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이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을 결성하였다. 미주 지역과 연계된 대한독립당과 의열단도 있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만주와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 운동이 전개되어 1932년 10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1934년 3월 난징에서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 신한혁명당 · 의열단 · 대한독립당 등의 대표자들을 모아 통일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때 임시정부 폐지 주장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 요인이 주축을 이루는 한국독립당은 찬반양론이 격돌하는 가운데 처음에는 통일 운동 불참을 결정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임시정부가 항저우에 자리하고 있던 1935년 6월 난징에서는 각 혁명 단체 대표대회를 열어 단일당 결성에 합의하였고, 7월에 한국독립당 · 의열단 · 조선혁명당 · 신한독립당 · 대한독립당 등 5개 정당과 단체가 통일을 이룬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서기장으로는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이 선임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 결성과 함께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에 빠졌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7명 중 김규식 · 조소앙 · 양기탁 · 유동열 · 최동오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하여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임시정부의 세력 기반도 상실하였다. 여당격인 한국독립당이 당을 해체하고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한 것이다. 이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송병조와 차리석, 그리고 단일당 참가에 반대한 김구 등은 1935년 10월 궐석이던 국무위원 5명을 선출하고 11월에는 한인애국단과 한국독립군 특무대 대원을 기반으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런데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하였던 세력들이 얼마 되지 않아 탈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의 조소앙과 신한독립당의 홍진 등은 김원봉의 의열단계가 조선민족혁명당의 실권을 장악하자 결성 두 달만인 1935년 9월에 탈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이청천 · 최동오 등도 1937년 4월 탈당하여 만주에서 이동한 세력을 중심으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7년 8월 난징에서는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이 재건한 한국독립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과 미주 지역의 대한인국민회 · 대한인단합회 · 대한부인구제회 · 동지회 · 대한인애국당 등의 우파 세력이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결성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의 좌파 세력과 연합하여 1937년 12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가 독립운동 세력들의 통일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1939년 8월 치장에서 한국혁명운동 통일 7단체 회의(7당 통일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통일 방식의 의견 차이로 5개 정당만 남고,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도 탈퇴하면서 통일 운동은 다시 좌절되었다.
충칭에 자리한 임시정부는 우선 한국광복군 창설에 주력하였다. 1940년 5월에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이라는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한중연합군으로 연합 작전을 펴기 위해 한국광복군을 편성하는 것을 양해하고 그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군사위원회는 광복군과 중국군은 위상이 다르다며 연합작전 제안을 문제 삼았다. 임시정부는 독자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를 조직하고 창군 계획을 마련하였다. 1940년 9월 15일에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창설을 선포하고 이틀 후인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려 하였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1941년 11월 중국 군사위원회의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한국광복군은 군비 · 재정 · 훈련 등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부대의 편제와 병력의 규모, 부대의 지휘와 운영 등은 중국의 지휘를 받아야만 하였다. 중국 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의 취소를 통보한 것은 1944년 8월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에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국정에 반영한 「건국강령」을 발표하고 1941년 12월에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즉각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전후 처리에서 연합국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2월 28일에는 독일에도 선전 포고를 하였다.
임시정부는 1944년 중국공산당 지역인 화베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만주의 항일 빨치산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화북조선독립동맹은 1945년 4월에 충칭에서 열리는 해외 항일조직 대표회의에 장건상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이충모는 만주 항일 빨치산이 소련으로 넘어가 88국제여단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김구의 신임장을 갖고 그들을 만나고자 만주로 가던 루트를 확보하던 중에 광복을 맞았다.
충칭으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당정 체제를 확립하였다.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3당이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어 9월에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고, 10월에는 국무위원제에서 주석제로 개헌을 단행하여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이라는 당 · 정 · 군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한편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좌파 세력은 임시정부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국민당 정부가 좌우합작을 권유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창구를 일원화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러자 좌파에서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1941년 12월 「옹호임시정부선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로 통일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하였다.
이 무렵 조선민족혁명당 관할 아래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원 상당수가 중국공산당 지역인 화베이 지역으로 이동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일부와 한국광복군 간의 군사적 통일이 이루어졌고 이어 정치적 통일이 추진되었다.
정치적 통일은 좌파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는 형식을 띠었다. 임시의정원은 좌파 인사들을 참여시키기 위하여 의원 선거 규정을 개정하였다. 1942년 10월에 실시된 의원 선거를 통해 한국독립당 소속 의원 29명, 좌파와 무소속 의원 17명으로 좌우연합에 의한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었다.
임시의정원이 좌우합작의 ‘통일의회’가 되면서 의정원 운영이 달라졌다. 여당과 야당이 존재하는 다당제 의회가 되었다. 회의에서는 종종 양자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야당들은 1941년에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발표한 「건국강령」을 수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건국강령」이 임시의정원을 통과한 입법이 아니라 국무위원회가 선포한 행정부 강령이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1943년에 열린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건국강령」 수정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건국강령」을 입법화하려 하였으나 결국 불발에 그쳤다.
1944년 4월 제36회 의정원 회의가 개최될 때에는 여야가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한국독립당 25명, 조선민족혁명당 12명, 조선민족해방동맹 3명, 무정부주의자연맹 2명, 통일동맹 1명, 무소속 7명이었다. 이 회의에서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하였다. 이때 개헌은 야당 의원들이 요구한 것으로 좌우익을 망라한 독립운동 정당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룬 최초의 ‘정치적 합의 개헌’이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근간으로 임시정부도 좌우연합 정부로 꾸려졌다. 김구 주석은 한국독립당, 김규식 부주석은 조선민족혁명당 소속이었다. 국무위원 14명도 한국독립당 8명, 조선민족혁명당 4명, 조선민족해방동맹 1명, 조선혁명자연맹 1명 등으로 배분되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정부로서 해방을 맞았다.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임시정부가 승인을 요청할 우선 대상자는 임시정부가 자리한 중국이었다. 임시정부의 국제법상 승인에는 무엇보다 소재지 국가의 승인이 절대 조건이었다.
1940년에 임시정부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좇아 충칭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승인 외교를 펼쳤다. 먼저 미국을 상대로 승인 외교를 펼쳤다. 1941년 2월에 김구 주석은 미국 루스벨트(F. D. Roosevelt)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해 6월에도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이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C. Hull)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고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대미 승인 외교를 강화하였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위원장에 임명하는 신임장을 발송하고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주미외교위원부를 설립하고 이승만을 공식 외교사절로 임명하여 전권을 위임하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승만은 신임장을 받자 곧바로 이를 미국 국무부에 제출하였다. 하지만 국무부는 전후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정리되고 중국 · 소련 · 영국 등 다른 연합국의 태도가 확정될 때까지는 이승만의 신임장을 접수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웠다.
중국에서는 국민당 정부가 먼저 1941년 10월에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꺼냈다. 외교부장 궈타이치가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창구를 임시정부로 일원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는 동시에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국무회의에 제출하고 영국 · 미국 정부와 협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에는 독립운동세력 내 좌익 진영도 임시정부에 참여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달렸다.
임시정부는 즉각 좌우합작 방안을 마련하고 중국 정부에는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였다. 1942년 1월에는 김구가 장제스에게 "중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은 두 나라 간 역사적이고 도의적인 이해득실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스럽다"는 내용을 담은 외교문서를 보내 조속한 승인을 촉구하였다.
1942년 3월 1일 3 · 1운동 23주년 기념일을 맞아 임시정부는 충칭과 워싱턴에서 각각 임시정부 승인 촉구 집회를 열었다. 충칭에서 열린 기념대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동시에 임시정부가 대일 교전국의 일원으로 참전하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워싱턴에서 열린 대한인자유대회에서는 주미외교위원부, 재미한족연합회, 한미협회 명의로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 무렵 쑨원의 아들이자 입법원 원장인 쑨커가 임시정부 승인을 거듭 주장하는 등 임시정부 승인 문제가 중국에서 공론화되는 가운데 국민당 정부가 연합국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한반도의 전후 처리 방안으로 국제 공동 관리, 즉 신탁통치를 선택하면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결국 외교 마찰을 우려한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 승인을 유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 달리면서 임시정부의 승인 외교는 더욱 급박해졌다. 1944년 6월 17일 외무부장 조소앙은 미국 국무장관 헐에게 공문을 보내 다시 한 번 연합국을 이끌고 있는 미국이 빠른 시일 안에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7월 3일에는 김구 주석을 비롯한 각료 전원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장제스에게 보내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전후 처리에 있어 합법적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임시정부의 끈질긴 외교 노력을 보여주었다. 국민당 정부는 미국과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입장이 분명하므로 단독으로 승인하기는 어렵다는 답을 보내왔다.
임시정부의 승인 외교는 전후 처리에 있어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신탁통치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었다. 해방 직후 임시정부는 「당면정책」을 발표하여 임시정부가 국내로 들어가 과도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정부 역할을 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거부하였고,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하였다. 승인 문제가 헌법 체계를 갖추고 20년이 넘게 명맥을 유지하였던 임시정부의 운명을 갈랐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주권을 상실한 국민들에게 미래의 주권을 약속하는 상징으로서, 27년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임시정부는 비록 해방된 한반도에서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주역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고난 극복의 역사에 대한 국민적 헌사는 헌법 속에 명문화되어 자리를 잡았다.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되었다. 제헌헌법은 전문에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하여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 · 재건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