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77년(고종 14)에 태어나 1946년에 사망했다. 초명은 홍면희이고 홍진(洪鎭)이라고도 쓴다.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검사를 역임하였다가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법무총장 등을 역임하며 조직 강화에 주력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동북 지방에 파견되어 여러 단체의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1930년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전력하여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홍면희(洪冕熹), 일명 홍진(洪鎭). 호는 만호(晩湖 · 晩悟). 충청북도 영동 출신이다.
1898년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한 뒤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평리원 판사로 승진하였고, 1905년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전임되었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검사직을 사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1919년 2월까지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해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인천시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13도 대표들과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열고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한 뒤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의원 · 법제위원장(法制委員長)을 지냈고, 또한 충청북도 충주군 조사위원과 충청도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21년 4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에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8월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조직하여 간사장에 선임되었다.
다음 해 7월 안창호(安昌浩) · 김구(金九) · 조소앙(趙素昻) · 이시영(李始榮) · 이동녕(李東寧) · 노백린(盧伯麟) 등 1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간의 반목 · 갈등 · 마찰을 해소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내무총장 · 외무총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926년 7월 국무령에 임명되어 김응섭(金應燮) · 이유필(李裕弼) · 조상섭(趙尙燮) · 조소앙 · 최창식(崔昌植) 등과 국무위원회(國務委員會)를 조직하였고, 9월에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시정 3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23년 10월에는 김동삼(金東三) · 김좌진(金佐鎭) · 오동진(吳東振) · 조성환(曺成煥) 등을 국무원으로 보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927년에는 유일당운동에 앞장서서 상해 · 베이징〔北京〕 · 광둥〔廣東〕 · 우창〔武昌〕 · 난징〔南京〕 등에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를 조직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11월 각지 대표연합회 예비회담을 상해에서 개최하고 유일당을 조직하게 하였다.
1927년 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동북 지방에 파견되어 3부(신민부 · 정의부 · 참의부)와 교민단 등 여러 단체의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회합을 가져 의견을 교환한 뒤 큰 단체를 형성하였다. 이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서 군민회의(軍民會議: 위원장 김동삼)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일경에 피검되고 군민회의의 활동이 침체되자 이를 수습한 뒤, 황학수(黃學秀) · 지청천(池靑天) · 신숙(申肅) 등과 함께 당세를 확장하여 한국독립당을 민족 대당으로 발전시켰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당군(黨軍)을 한국독립군으로 개편하고 총사령에 지청천을 선출, 항일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펴 치열하게 싸웠다. 한편 경혜춘(慶惠春) 등 여러 동지와 함께 만주중동선 연변 동부 일대의 교포들을 설득하여 무장 독립항전에 적극 가담하게 하였다. 1932년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자 1933년 난징으로 가 산해관 이남과 미주 · 노령 등지에 흩어져 있는 각 혁명단체들이 하나로 합쳐 항일전선을 펼 것을 절규하였다.
1934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과 난징에서 조직된 한국혁명당을 통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재조직하고 조소앙과 같이 지도하였다. 1937년 7월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 한국국민당이 남경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어 연합회의 결성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미주에 있는 대한독립단동지회 · 국민회 · 부인애국단 · 단합회 · 애국단 등과 교섭하여 1937년 8월 1일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이칭: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이 출범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 단체가 되자 조소앙 · 엄항섭(嚴恒燮) · 조경한(趙擎韓) 등과 함께 직접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1940년 광복진선의 9개 단체가 통일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자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임되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전력,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