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金九)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체로 하여 중국 내의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조소앙) · 조선혁명당〔지청천(이칭: 이청천)〕과 그 밖에 미주 대한인국민회〔북미대한인국민회〕,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 · 대한인단합회 · 대한인부인구제회 · 대한인동지회 · 한인애국단 등 9개 단체에 의해 1937년 8월 결성되었다.
당시 공동의 적인 일본과 싸우고 있던 중국 국민당정부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후원함으로써 항일연합전선을 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지원하였다. 중국국민정부측은 나아가 항일독립운동을 펴고 있던 의열단계 김원봉의 조선민족전선연맹과도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종용하였다.
중일전쟁이 가열되자 임시정부는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옮기고 중국국민정부의 후원을 받아 활동하였다. 이곳도 일본군의 침공을 받게 되면서 1938년 이후 유커우[幽州] · 충칭[重慶] · 한커우[漢口] 등을 전전하면서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중일전쟁에서 중국 측이 큰 타격을 입자 김구를 중심으로 한 연합회 간부들은 장래의 투쟁목표를 의논하게 되었다. 그 결과 3개 대(隊)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제1분대는 중국 동북지방, 제2분대는 한국, 제3분대는 일본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분담구역 내 일본의 중요관공서 폭파 및 고관암살을 결행하고, 치안을 교란시켜 독립을 달성하고자 계획하였다.
창사에 본거지를 둔 연합회는 안공근(安恭根) · 안경근(安敬根) 등을 홍콩에 파견하여, 이곳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안정근(安定根) · 김인(金仁: 김구의 장남) · 안우생(安禹生: 안공근의 장남) 등과 함께 동지규합에 힘쓰는 한편, 항일선전자료 및 그밖의 정보수집에 종사하였다.
중국국민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겨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홍콩 방면에서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그 뒤 김구와 김원봉 등의 제휴로 전국연합진선협회가 결성되어 한층 적극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될 때까지 민족주의진영의 독립운동연합체의 소임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