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동지회 ()

근대사
단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정대통령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하와이의 한인들이 호놀룰루에 설립한 민족운동 단체.
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정대통령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하와이의 한인들이 호놀룰루에 설립한 민족운동 단체.
설립목적

미주한인사회를 이승만 중심으로 결속해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1. 동지회 및 지회 설립

임정 대통령에 임명된 뒤 1920년 12월 처음으로 상해를 방문하고 하와이로 돌아 온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임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방편으로 하와이 한인들과 함께 동지회를 설립했다. 1921년 7월 7일 하와이 네 섬의 지도자가 모인 환영회 석상에서 동지회 설립을 결의한 후 7월 14일 민찬호·안현경·이종관의 명의로 15개조의 동지회 「규정」을 제정해 공포하였다.

「규정」에 나타난 동지회의 설립 목적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며 대동단결을 도모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임정대통령 이승만 중심으로 결속을 다지기 위한 대외 명분용이었다. 조직은 회장 체제로 하지 않고 주무원·서기·재무로 구성했다. 이와 같은 조직 구성은 첫째, 운영의 주체를 오직 이승만에게 두겠다는 것과 둘째, 대외 활동용 체제라기보다 대외 지원용 체제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설립 초기 동지회에서 활동한 인물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을 역임한 이종관이 주무원으로 활동했고 그 밖에 안현경, 최살로매, 민찬호의 부인 민메리, 서기문 등이 참여했다. 하와이 초대 민단장인 민찬호는 1922년 2월경까지 동지회 재무를 맡았다. 동지회의 활동 경비는 회원들에게 동지금이란 명목으로 거두어 주로 이승만의 외교활동비와 주무원의 월급으로 사용했다.

동지회는 1924년 11월 17일부터 20일까지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한인대표회를 개최하여 조직과 운영을 강화하였다. 한인대표회는 대표회장 장붕의 사회로 동지회 24개 지방대표를 비롯해 하와이 교민단,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학원찬성회, 태평양잡지사, 한인기독교회, 부인보조회, 대한부인구제회의 7개 단체 대표 등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지회 3대 「정강」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4대 「진행방침」을 제정하고 총재, 이사부, 실업부로 조직을 강화했다.

3대 「정강」에 나타난 동지회의 성격을 보면, 먼저 3·1독립선언서에 있는 정의·인도와 비폭력의 희생정신을 그대로 계승함으로써 동지회의 정신적 뿌리가 3·1운동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다음으로 조직적인 행동을 위해 개인행동이 아닌 단체 행동에 주력하되 상명하복의 복종을 강조하여 일사불란한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자족자급의 민족경제력 개발을 강조하여 동지회의 활동이 정치 활동뿐만 아니라 경제 능력을 배양하는 것도 중시하였다. 이를 위해 실업부를 신설하였다. 이로 보면 동지회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대업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단체의 속성과 동지 회원들의 경제생활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자치단체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동지회 4대 「진행방침」으로는 1차적으로 1백만의 동지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이를 위해 동지회의 정강과 방침에 동의하는 모든 남녀를 동지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리고 한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노력을 애국애족하는 중대한 책임이자 경제활동의 방침으로 중시했다. 새로 결성한 동지회 이사부의 이사원은 하와이 교민단장 김영기(金永琦), 한인기독교회 중앙부장 민찬호(閔燦鎬), 한인기독학원 김노디, 대한부인구제회 중앙부장 김유실(金裕實), 한인기독학원찬성회 중앙부장 곽래홍(郭來弘), 태평양잡지사 주필 윤치영(尹致映), 동지회 주무원 김성기(金星基) 등 7명으로 정했다. 이들 가운데 민찬호는 초대 이사부장에 선임되었다. 이사부는 지회와의 구별을 위해 중앙 이사부 또는 중앙부, 이사부장은 중앙부장으로 통칭되었다. 역대 중앙 이사부장은 이원순(1935∼1937), 김이제(1938), 손승운(1939∼1944) 등이다. 한성임시정부 집정관총재의 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이승만을 ‘총재’라 하고 총재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이사부 체제로 만들었다.

새로 제정된 동지회의 「정강」과 「진행방침」에서 자족자급의 민족경제력을 갖추기 위해 실업부를 두기로 하면서 「동지회합자회사규칙」을 제정하고, 임시로 민찬호·김영기·윤치영을 재무로 선임했다. 이후 실업부는 ‘동지합자회사’ 설립을 위해 1925년 9월 「동지합자회사규칙」을 제정하였고 이를 다시 보완해 1925년 12월 13일 ‘동지식산회사’를 설립, 동지회의 주력 사업으로 삼았다.

동지회는 10인 이상의 회원들이 모이면 지회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하와이 각 지역에서 지회가 설립되었고 1925년 초 상해지회를 비롯해 뉴욕지회, 나성(로스앤젤레스)지회, 리들리지회, 시카고지회 몬타나지회, 디트로이트지회 등이 잇달아 설립되었다.

  1. 북미동지회총지부 조직

미일전쟁 발발 이후 하와이가 군사계엄령 하에 들어가면서 하와이 한인단체들의 대외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자유로운 활동을 추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다 제2차 대전 발발이후부터 미주한인의 활동 근거지는 하와이가 아닌 미국 본토, 특히 워싱턴DC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연유로 하와이에 편중되어 있는 동지회 중앙부만으로는 활발한 대외활동은 물론 동지회의 발전조차 기대하기 어려웠다. 미국 본토에 산재해 있던 동지회 지회들은 역량을 결집해 통일된 행동을 모색하고 1942년 6월 18∼20일까지 시카고에서 북미동지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참석한 동지회 각 지부와 대표자는 시카고지방회(대표: 남정헌·김홍기), 나성지방회(대표: 김종림), 뉴욕지방회(대표: 안어진·최용진), 몬타나지방회(대표 대리: 정택은)이었다.

대회 결과 북미동지회총지부라는 통합 조직체를 조직하기로 하였고 그 밑에 의사부와 행정부를 두기로 했다. 의사부는 각 지방에서 선정한 대표 1인으로 구성했고 행정부는 북미동지회 총지부장 남궁염, 서기 김세선, 회계 최용진, 편집부원 안어진으로 선임했다. 북미동지회총지부는 1942년 12월에 개최한 북미민중대회 이후 동지회북미총회로 개명하고 1943년 9월부터 『북미시보』를 발간해 기관지로 삼았다.

동지회북미총회의 결성은 이후 북미지역 동지회 세력의 급격한 발전을 가져왔다. 북미지역 동지회는 1945년 당시 남가주지방회·중가주지방회·북가주지방회·오레곤지방회·몬타나지방회·시카고지방회·뉴욕지방회 등 7개 지방회로 확대되었다.

회세가 확장된 동지회북미총회는 1945년 5월 26일 제1회 동지회 미포대표회를 개최했다. 미포대표회는 정치·외교·군사운동으로 광복사업을 촉진하기 위해 기존의 동지회 명칭을 ‘대한민주당’으로 개정하기로 했다. 이것은 해방을 앞둔 시점에서 동지회가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을 담당할 수 있는 정당체제로 탈바꿈 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3대 「정강」 외에 ‘대한민족의 절대독립을 주장함’, ‘민주주의를 수립하여 정체를 건설함’, ‘활민운동으로 인민의 자유와 생명재산을 보장’하는 것을 새로 추가하였다. 그리고 하와이 동지회 중앙부를 중심으로 하와이총회와 북미총회를 관할하기 위해 북미 4인과 하와이 8인 등 총 12인으로 구성한 중앙위원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지회북미총회가 제기한 ‘대한민주당’으로의 명칭 개정과 3대 「정강」의 보완, 중앙위원부의 설치 등은 하와이 동지회 중앙부와 동지회 회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실현되지 못했다.

기능과 역할

동지회는 1925년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한 후 98명의 한인들이 낸 약 2만 9220달러의 자본금을 갖고 힐로섬 올라아 지역의 임야 960에이커를 구입해 동지촌을 건설하고 본격적인 경제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동지식산회사의 사업은 자본 부족과 사업 능력 부족으로 1931년 파산하고 문을 닫았다.

이승만은 동지식산회사가 파산 직전의 상황인 1930년 7월 15일∼21일까지 호놀룰루에서 동지미포대회를 개최하고 동지회의 부흥과 동지회 중심의 역량 결집을 도모하였다. 대회 결과 총재인 이승만의 권한은 대폭 강화되었고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동지회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동지회 중심의 확장에 반발한 김현구와 손덕인이 이승만의 처사에 대항하면서 분쟁으로 격화되어 동지회는 기존의 하와이 교민단 세력과 단절하고 말았다.

한동안 위축된 동지회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계기로 다시금 자체를 강화하였다. 그러한 성과는 1933년 외교활동을 각 단체가 개별적으로 전개하기보다 협력해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 단체 연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동년 4월 9일 6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하와이 한인연합협의위원회를 설립하고 15개조의 규칙과 함께 기관보로 『협의회보』를 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지회는 다시금 회세를 상당히 회복할 수 있었다. 그 힘으로 1935년부터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합동운동을 추진하여 1938년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두 단체의 합동운동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동지회의 대외 위상은 크게 제고되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동지회는 하와이와 북미의 두 대한인국민회와 함께 1941년 4월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를 주관하며 최대 독립운동 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아울러 동지회 총재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주미외교위원부를 신설해 이승만을 임시정부의 외교 대표로 공식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42년 말부터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문제를 두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와 이승만 간에 알력이 생긴 후 전면전으로 발전해 집행부는 주미외교위원부에 대한 지원금을 중단하였다. 동지회 중앙부가 관여하고 있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는 이러한 갈등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승만이 독자노선을 굳히면서 그동안 합력하며 미주한인사회를 이끌어 왔던 동지회는 1943년 12월 23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이에 따라 이승만에 대한 외교활동의 지원은 동지회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동지회는 미주한인사회의 중심에서 이탈해 이승만 지지세력들로만 결속하였다. 탈퇴하는 과정에서 김영기·도진호·안현경·민함나 등 동지회 주요 인물들이 반발함으로써 하와이 동지회는 더욱 위축되었다. 이것은 북미지역 동지회가 더욱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의의와 평가

동지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며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이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임정대통령에서 탄핵되어 면직된 후 한 때 반임정 활동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승만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이탈해 독자노선을 추구할 때 동지회 또한 이승만의 뜻에 따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해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다.

이처럼 동지회는 철저하게 이승만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조직된 정치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다. 동지회는 종신 총재 이승만을 위한 단체였지만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활동한 이승만을 도움으로써 미주한인사회에서 중요한 독립운동의 단체로 활동했다. 동지회는 대한인국민회와 함께 미주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민족운동 단체였다. 그러나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 선거로 일꾼을 뽑는 미국에서 종신 총재를 두고 운영된 것은 동지회만이 가진 특색이자 또한 한계였다. 동지회는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적극 지지하는 단체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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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보』
『국민보』
『태평양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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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해외한족대회연구」(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1930년대 후반 하와이 한인의 통일운동」(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2, 1998)
집필자
홍선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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