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대항하여 만들었다. 1935년 11월 초순부터 비밀 협의를 거쳐 같은 달 하순에 창당되었다. 순수한 민족주의에 입각한 정당으로서, 좌익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과 무정부주의 계열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대립하면서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하였다.
이사장은 김구, 이사는 이동녕(李東寧) · 송병조(宋秉祚) · 조완구(趙琬九) · 차이석(車利錫) · 안공근(安恭根) · 엄항섭(嚴恒燮), 감사는 이시영(李始榮) · 조성환(曺成煥) · 양묵(楊墨) 등이었다.
당명을 한국국민당으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어 한국의 고유문화를 살리고 서양 문화를 반대하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도 반대하였다. 독립책략상에 있어서도 소련과의 연합을 반대하고, 또한 반제(反帝) · 반전(反戰)을 주장하던 일본 민중과의 연합도 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상 면에서는 국수주의적이며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당의 정치강령인 삼균주의(三均主義)와 토지국유화정책 등의 주장은 현대화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 당은 창당 과정에서부터 중국 국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창당 당시 당원은 100여 명이었다.
1936년 7월과 1937년 2월에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 및 한국청년전위단(韓國靑年前衛團)의 두 외곽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한민(韓民)』과 『한청(韓靑)』 두 잡지를 발간하여 당의 독립사상을 선전하였다. 1937년 루거우차오사건[蘆溝橋事件]을 전후한 시기에 김구와 이동녕의 영도 아래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운동단체들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안공근의 갈등으로 특무공작에 적극적이었던 청년당원들이 탈당함으로써 안공근이 주도하던 정보공작과 청년들의 특무공작이 부진해졌고, 따라서 당의 활동도 미약하게 되었다. 이에 김구 등 당내 영수들은 부득이 우익파 광복운동단체들을 통합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과 함께 합병하여 광복진선(光復陣線)을 형성하고, 장개석(蔣介石)의 중개로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위해 김원봉의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제휴를 시도하였다.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가 1939년 8월 27일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열렸다. 1939년 9월 22일경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陣線協會)를 조직하였으나, 두 세력의 사상적인 괴리가 심해 실패하고 만다. 그 뒤 1940년 4월 1일 민족주의 진영의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과 함께 3당이 합병하여 새로운 한국독립당 창당에 결의하였다. 1940년 5월 8일 제2차 통일대표회의가 종료되는 날 3당 대표 공동명의로 「3당해체선언」을 발표해 당의 해체와 신당의 출범을 공식 선언하였다. →한국독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