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서입환(徐立煥). 호는 동암(東岩).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뒤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안창호(安昌浩) 등과 평안도에서 대성학교(大成學校)를 경영하며 인재 육성에 진력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 · 1운동 때는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4월에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기자로도 활약하였다.
1922년 2월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선출 의원이 되었으며, 1930년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상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민족진영의 독립지사들을 한데 묶기 위해 조직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그 주요 실무간부로 활동하였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홍보선전책자로 「한보(韓報)」 · 「한성(韓聲)」 등을 발행, 배포하는 등 당의 기본 강령 실천과 그 이념 전파에 진력하였다.
1933년 항저우[杭州]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대일투쟁 의욕을 드높이는 데 노력하였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한 5당[ 의열단(義烈團) ·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 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통합을 통해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될 때, 5당 통일에 주도적인 임무를 담당했던 김원봉(金元鳳) · 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폐쇄를 강력히 주장, 임시정부가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더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김규식(金奎植) · 조소앙(趙素昻) · 최동오(崔東旿) · 양기탁(梁起鐸) · 유동열(柳東說)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임시정부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김구(金九) · 이시영(李始榮) · 조완구(趙琬九) · 김붕준(金朋濬) · 양묵(楊墨) · 이동녕(李東寧) · 안공근(安恭根) · 엄항섭(嚴恒燮) 등과 임시정부를 유지하기로 뜻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3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어 주석에 이동녕이 선출되었을 때 비서장(祕書長)에 선출되었다.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서 독립운동에 진력하다 충칭[重慶]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