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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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를 합쳐 부르는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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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를 합쳐 부르는 지명.
내용

흔히 관서지방이라고도 한다. 평안이란 평양과 안주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지명이다. 평안도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일찍 개발된 곳이다.

이곳은 고조선·위만조선이 건국되었으며, 이 시기에 평양은 북쪽에 부여(扶餘), 동쪽에 예(穢)와 옥저(沃沮), 남쪽에 마한과 접하고 있었다. 한나라의 무제(武帝) 때 이곳에 낙랑·임둔·진번·현도의 4군이 설치되었다.

서기 43년(대무신왕 26)경 고구려의 영토가 살수(薩水 : 지금의 淸川江) 이북을 차지하였고, 광개토왕 때 낙랑군이 멸망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로써 400여 년간의 이곳에 대한 중국 통치가 끝났다. 장수왕 때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져 보장왕 때까지 316년간 이곳을 고구려가 다스렸다.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와 함께 9개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다가 신라의 저항으로 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겼으며, 대동강 이남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 효소왕 이후에는 대동강 이북이 발해의 영토가 되었고, 10세기경 신라 경애왕 때 발해가 망하자 이 지역은 북여진(北女眞)·거란 등의 영토가 되었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철원을 근거로 이 지역에 13개 진을 설치하였고, 고려 태조가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995년(성종 14)에 관서도(關西道)라 하였고,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여 관서도를 다스렸다.

정종 때북계(北界)로 개칭하였다가 1102년(숙종 7)에 서북면(西北面)으로 바꾸었다. 1269년(원종 10)서북면의 여러 성이 몽고에 편입되어 자비령(慈悲嶺) 이북은 몽고의 영토가 되었다.

또한 서경에는 동녕로총관부(東寧路摠管府)가 설치되었으나 충렬왕 때 영토가 고려에 환원되었다. 충숙왕 때 침입한 여진족을 이곳에서 격퇴시켰으며, 공민왕 때 처음으로 강계·위원·초산·벽동의 군현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1413년(태종 13)평안도로 개칭하였고, 1440년(세종 22) 여연(閭延)·상무로(上無路)·우예(虞芮)의 땅을 나누어 무창군(茂昌郡)으로 하고, 1443년 우예군을 증설하여 이 도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1455년(세조 1)에 무창·우예군을 폐하였다. 조선 초기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8도로 정하고 각 도를 동서 또는 좌우로 나누어 불렀는데, 평안도는 평안동도와 평안서도로 구분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23부제로 변경함에 따라 평양·의주·강계의 3부(三府)로 되었고, 1896년 13도제로 개편함에 따라 청천강을 경계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나누어졌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집필자
원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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