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때 좌도수군도안무처치사 본영(左道水軍都按撫處置使本營)을 부산포에 두었다.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이름이 바뀐 것과 울산의 개운포(開雲浦)로 영을 옮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부산포로 다시 옮긴 것은 1635년(인조 13)이었다. 그 뒤 1652년(효종 3)에 영을 다시 개운포로 옮겼다. 부산포는 왜국(倭國)과 가까워 일찍부터 군사시설을 강화하였는데, 이곳에는 부산진(釜山鎭)이 함께 있었다. 부산포진은 군사체제상 동래도호부사의 지휘를 받았으며 부산포진 첨사(僉使)가 다스리는 부산진성은 주위가 5,356척이고 높이가 13척이나 되었다.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는 정공단(鄭公壇) 터가 성의 남문이 된다. 성 안에는 130여 명의 상주군(常駐軍)이 있었고 6척의 군선(軍船)이 있었다.
부산참(釜山站)은 위급 사항을 알리는 군사시설이었으며 부산창(釜山倉)에는 왜관(倭館)의 비용을 쓰기 위하여 동래·울산·기장(機張)에서 수납한 세미(稅米)를 보관하였다. 부산포진 안에 있는 염전(鹽田)은 영내의 비용을 충당하는 데 이용하였다. 세종 때 허가한 왜관은 부산진의 성 밖에 울타리를 치고 살도록 하였는데, 그 수가 늘어 중종 때 300여 명에 달하였다.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 부산포진 첨사 이우증(李友曾)이 살해된 뒤 왜관을 폐쇄시켰다가, 1678년(숙종 4)에 왜관을 초량(草梁)으로 옮겨서 설치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진성은 왜군의 첫 공격 지점이 되었으며, 이때 부산첨사 정발(鄭撥)이 순직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이순신(李舜臣)이 부산포해전에서 왜선 100여 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행정구역상으로 부산포는 동래도호부의 부산면(釜山面)으로 존속하였다. 부산포는 부산면에 있었던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07년부산부(釜山府)가 설치되면서 부산포는 동래에서 분리되었다. 부산포는 왜관·부산개시(釜山開市)·부산진성 등을 통하여 우리 나라와 일본 사이의 거래가 가장 밀접하였던 곳이었다.
부산의 지명 유래는 1368년(공민왕 17)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기증하는 백미 1,000석을 부산포에서 반출할 때 산의 형태가 솥처럼 생겨서 이때부터 부산(釜山)이라 불렀다. 그러나 부산포(富山浦)라는 지명은 일찍부터 사용하였고 부산(釜山)이라는 지명과 혼용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