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오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내무부 지방국장, 국민부 외교위원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2년(고종 29)에 태어나 1963년에 사망했다. 1903년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 중앙종학원을 졸업하였고 강동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 때 대동청년회를 조직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천도교 대표로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되었다. 만주지역의 정의부, 한족동향회, 조선혁명당 등에서 활동하다가 관내로 이동하여 북경과 상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임시의정원의원, 외무위원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최동오(崔東旿)는 일제강점기 천도교인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의산(義山)이며, 이명은 최학원(崔學源) 또는 최동오(崔東五)이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최동오는 대동청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3월 2일 의주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3일에는 기독교와 연합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0월 의주와 선천지역 천도교단의 후원아래 천도교대표로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되었다. 11월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가 되었으며, 1920년 3월에는 내무부 지방국장으로 승진하였다. 1921년에는 요주의인물로 일제 당국에 낙인찍혀 몇 차례 취조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최동오는 만주 동삼성(東三省)으로 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김동삼(金東三) · 현익철(玄益哲) · 김이대(金履大) · 김원식(金元植)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였다. 1928년 2월에는 한족동향회(韓族同鄕會)를 조직하여 중국에 있는 동포를 보호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929년 정의부 · 신민부(新民府) · 참의부(參議府)가 국민부(國民府)로 통합되자 국민부 외교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뒤 국민부의 조직 개편으로 독립운동사업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서 전담하게 되자 조선혁명당의 국제부장이 되었다. 1931년 7월 2일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최동오는 길림한교만보산사건토구회(吉林韓僑萬寳山事件討究會)를 조직하여 중국관민과의 교섭 및 사건의 실정조사를 진두지휘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해 독립군에 대한 일제의 공격이 거세지자 1932년 11월 관내(關內)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최동오는 북경과 상해를 중심으로 유동열(柳東說) · 현익철 ·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35년에는 김원봉(金元鳳) ·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기도 하였다. 최동오는 또한 1945년 광복이 되어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임시의정원의원, 외무위원 등 다양한 직책을 맡으면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