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은 그 교지(敎旨)가 시천주(侍天主)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이다. ‘동학’이란 교조 최제우가 서교(西敎:천주교)의 도래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 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에는 손병희(孫秉熙)에 의하여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한울에 대한 공경인 경천과 시천주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내 몸에 천주(한울님)를 모시는 입신(入信)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경천사상에 바탕한 나라 구제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에 이르러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事人如天].’는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되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의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한울에 내재한 것으로 보는 물물천 사사천(物物天事事天)의 범천론적 사상(汎天論的思想)이 널리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손병희는 더 나아가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을 동학의 종지(宗旨)로 선포하였다. 동학의 사회사적 의의는 양반사회의 해체기에 농민대중의 종교가 된 점에 있다. 동학사상과 동학운동은 서민층의 반왕조적인 사회개혁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최제우의 창도단계에서는 서민층에 널리 유포된 신앙형태이었으나,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해 민중의 집단적 시위운동으로 전환되면서 탐관오리의 혁파, 외세 배척 등 정치적 요인이 끼어들어 사회운동의 요인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동학농민운동에 와서는 동학의 종교운동이 쌓아 올린 만민평등의 이념과 그 교문조직이 기반이 되어 농민운동의 집대성인 사회개혁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동학군이 표어로 내세운 ‘제폭구민(除暴救民)·축멸왜이(逐滅倭夷)·진멸권귀(盡滅權貴)’는 이미 동학운동이 혁명적인 사회개혁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말해 준다.
개항·개화기에 동학운동은 단발령에 대한 지지세력이 되어 개화운동 편에 서서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켰고, 1905년 천도교 선포 이후에도 개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흥학회운동(興學會運動)에 공명하여 보성학교와 동덕학교 등 많은 학교경영을 통하여 신교육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천도교운동은 신민회운동(新民會運動)과 더불어 널리 서민층에 뿌리를 내려, 3·1운동에 나타난 자주독립의 민족주의 역량을 키운 민족운동 세력으로 근대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 오랜 정신적 방황과 수행을 거쳐 마침내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득도하였다고 그의 경전 저술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때 그의 종교적 체험이 동학창도의 기점이 되며, 1905년 손병희의 천도교 선포에 이르는 동학운동의 교리와 조직의 원리를 제공한 것이다.
동학이 널리 영호남 서민층의 반왕조적 민심을 기반으로 하여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사회적 종교로 대두된 데는 조선왕조의 시운이 다하였다는 말세관과 사회변동기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양반사회의 신분 차별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적서(嫡庶)의 차별을 괴로워하였던 서민계층에서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에 대하여 공명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제우 자신이 몰락양반의 서출로 깊은 소외감을 가졌던 사실 또한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의 아버지 최옥(崔鋈)은 한학자로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그의 문집 ≪근암집 近庵集≫은 최제우에게 끼친 유교적 교양의 일단을 말해 주고 있다.
청소년기 최제우의 내면적 갈등은 문장 도덕이 높으면서도 벼슬을 못한 아버지에 대한 동정, 가문을 위하여 입신양명을 할 수 없는 서출로서의 자기 처지, 비천한 신분의 생모에 대한 열등감이 원인이 되었다.
그는 40세까지 일정한 직업 없이 명산대찰을 찾아 구도의 방황을 계속했다. 그가 관명인 제선(濟宣)을 제우(濟愚)로 고친 동기는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대각하려는 깊은 자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시운이 쇠하여 개벽을 대망하는 말세였다. 그는 이러한 시운에 대하여 “아국 운수 가련하다.”라고 하였고, 왕조사회의 기강이 무너져 ‘천명을 돌보지 않는’ 경천의 가치관이 무너진 난세로 보았다. 당시의 사회는 ‘나쁜 질병이 가득찬 혼탁한 세상’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국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지진·역병 등이 가중되어 전국적인 농민폭동의 민란의 시기에 접어든 데 있었다. 서양의 이양선(異樣船)의 출현과 서학의 전래도 왕조 질서의 동요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제우의 서교에 대한 이해가 동학 창도와 관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천시(天時)와 천명(天命)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서교와의 대결을 위해서는 아국 운수의 회복을 염원하여 우리 민족도 경천사상을 되찾아 천도를 받은 새 종교 동학의 창도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동학 득도의 종교적 체험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만고없는 무극대도’를 맞은 것이 된다. 득도체험은 갑자기 몸과 마음이 떨리고 무슨 병인지 가늠할 수 없는 강령적 인격전환의 순간에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와 문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제우는 이 순간의 체험을 강령(降靈)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있는’ 종교적 깨우침의 상태로서 강령체험에 의하여 수심정기(守心正氣)의 새 도를 깨쳤다고 생각하였다.
1861년부터 최제우는 득도체험을 기초로 하여, 한편으로 주문을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령의 방법을 만들어 시천주의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신도가 많이 모여들어 경주 일대의 민가에서는 13자 주문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를 외는 소리가 집집마다 들리고, 이렇게 하여 초기 동학교문이 형성되어 갔다.
동학의 사상 내용에는 유(儒)·불(佛)·선(仙) 3교가 종합되어 있다고 하나, 그것을 통일하는 사상은 우리 민족의 경천사상과 구제를 위한 민족적 염원이며, 민간신앙적 요소가 널리 서민들에게 동학의 신봉자를 얻게 해주었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불교와 유교에 대하여 “유도·불도 수천 년에 운이 역시 다하였던가.”라고 하여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대부 양반계층의 종교였던 유교의 사상 내용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무학의 서민들이 10여 년의 수학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고 입도한 그 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에게도 군자의 인격을 갖출 수 있는 인격적 자존의 길을 열었다.
한편, 서학에 대해서는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도이므로 막강한 힘을 가졌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최제우는 천주나 천도가 서학의 독점일 수 없고 특히 동학이 서교와 다르다는 것을 뚜렷이 밝힐 필요를 느껴, 서교와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서교에서는 빌어도 효험이 없다고 하여 주술적 요소의 결여를 들고, 서교의 조상숭배 배격과 제사 부정을 공격하였다. 또한 서교의 내세관을 비판하여 ‘죽어서 천당간다.’는 내세관에 대하여, 오직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것이 기이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서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비판은, 서양의 세력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위험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는 척사(斥邪)이다. 서양 문명과 서양 군함의 내습은 곧 천하 분란의 문명적 위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은 중화문화권인 천하(天下)의 붕괴 속에서 내 나라를 단위로 한 ‘보국(保國)’의 종교이고, 안으로 ‘안민(安民)’의 새 사상이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종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동학교문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켰다고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여 금지시키고, 교조 최제우는 추종자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864년 봄, 대구감영에서 혹세무민죄로 사형에 처하여졌다.
동학의 기본사상은 최제우의 저술로 전해지는 두 가지 경전 ≪동경대전 東經大全≫과 ≪용담유사 龍潭遺詞≫에 나타나 있다. ≪동경대전≫은 한문으로 된 글로서 포덕문·논학문·수덕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용담유사≫는 한글 가사체로 되어 있으며 <용담가>·<안심가>·<교훈가>·<권학가>·<흥비가>·<도수가>·<몽중노소문답가>·<도덕가> 등이 있다. ≪용담유사≫는 풍월을 노래한 가사가 아니고, 자신의 사상을 도인들에게 전하려고 지은 일종의 사상가사이다.
이 가사체는 무학의 서민과 아녀자들이 읽고 음송하는 동안에 외워서, 동학의 사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가사체의 문체도 훌륭하여 문학적인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그 운율은 3·4조, 4·4조가 우세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것과 같다.
<용담가>는 자신의 가문과 신라 고도 경주의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였고, <안심가>는 부인을 안심시키는 형식으로 일반 도중(道衆)에게 수도를 계몽하고 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보국의 신념을 역설했다.
<몽중노소문답가>는 꿈속에서 노소가 문답을 하는 우화체로, 참위설(讖衛說)과 풍수지리설에 기초한 이망(李亡)의 예언요(豫言謠)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조선왕조 400년이 시운을 다하여 쇠망하고 새 시대가 도래함을 노래하고 있다.
<권학가>는 민심이 날로 험악해지는 시운의 변천을 예감하면서, 도덕의 공부를 쌓아 천리(天理)를 따르고 천명을 배울 것을 권하는 경천신앙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원전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최시형이 암송하였던 것을 구송 대필하게 하여 오늘에 전한다는 설이 있다.
최시형이 피신하여 다니면서 포교하던 시절, 1880년 5월강원도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만들어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다음해에 충청북도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으나, 현재 전하는 목판본은 1883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간행된 것과 경주판이 남아있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나타난 동학의 신앙대상은 ‘천(天)’ 또는 ‘천주(天主)’·‘한울님’이었다. 창도 당시 최제우의 중심사상은 경천의 ‘시천주’신앙을 바탕으로 한 ‘보국안민’의 종교였다.
그러나 동학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제2대 교주 최시형에 와서는 시천주신앙보다 세속화되어 ‘사인여천(事人如天)’·‘이천식천(以天食天)’, ‘양천주(養天主)’ 등을 내세우게 되고, ‘물물천사사천’의 주장과 같이 서민들의 생업, 농사·장사 등 상공업을 신성시하게 해 주는 범천론적으로 되었다.
이어 1905년 천도교 선포 이후 손병희대에 이르러 위의 두 교주의 사상을 ‘인내천’의 종지로 교의화하였는데, 최제우와 최시형의 설법이나 남긴 글에는 ‘인내천’이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천도교창건사 天道敎創建史≫에서 ‘천도교의 종지를 인내천이라 한 것은 의암성사(義庵聖師:손병희)의 창언이니’라고 한 것을 보아도, ‘인내천’은 손병희가 천도교를 선포한 뒤에 만든 종지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동학에서의 ‘천’이나 ‘천주’의 규정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근대화되어 감에 따라 보다 인간화되고, “사람이 곧 한울이다.”라는 ‘인즉천(人卽天)’까지 ‘천’의 인간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최제우는 ≪동경대전≫이나 21자 주문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에서 보편자를 ‘지기(至氣)’·‘천’·‘천주’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는데, 특히 그의 주문의 ‘천’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그 주문에서 보편자적 존재로는 ‘지기’와 ‘시천주’의 두 가지가 제시되어 있는데, 이 주문만으로는 ‘지기’와 ‘시천주’와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 그는 과연 ‘지기’를 본체로 삼는 기일원론자(氣一元論者)였는지, ‘천주’를 모신다는 점에서 천주를 보편자로 삼았는 경천의 사상가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주문 암송에 의한 무아경(無我境)의 경지에 이를 것을 기원한 점에서, 그 인격전환상태는 ‘지기’가 크게 내린 상태요 천주를 모셔서 조화가 정하여진 상태일 것이다.
‘지기’에 대하여 <논학문 論學文>에서, ‘지기’는 ‘무사불섭(無事不涉)’·‘무사불명(無事不命)’의 보편자로 ‘혼원일기(混元一氣)’라 한 데서 서경덕(徐敬德)의 기철학(氣哲學)의 유에 속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구절에서 선교(仙敎)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글은 강령지문(降靈之文)이라고 하였듯이, 강령체험을 기철학적 개념으로 표현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시천주’의 ‘시(侍)’에 관해서도 “내유신령(內有神靈)하고 외유기화(外有氣化)하여, 일세지인(一世之人)이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시천주’는 ‘한울님의 공경’이요 천주에 대한 ‘경외지심(敬畏之心)’을 가진 상태이다. 따라서 ‘시천주’는 한울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상태에 한 걸음 나아간 강령체험의 상태이다.
<권학가>에서 “한울님만 공경하면 자아시(自兒時) 있던 신병물약자효(身病勿藥自效) 아니런가.”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시천주’의 신앙체험을 가지면 신병이 낫는다는 것으로 풀이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이 최제우의 동학에 영부(靈符)와 강령의 요소가 섞여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사상적 위치가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민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은 민간신앙적 형태였고, 이러한 요소들에 대하여 점점 탈피해가고자 하는 뚜렷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일일시시(日日時時) 먹는 음식, 성경이자(誠敬二字) 지켜내어, 한울님만 공경하면” 어렸을 때부터의 오랜 지병도 치료된다고 하였다.
‘성경이자’란 유학적 덕목으로서, ‘시천주’는 ‘성경’의 덕을 지켜내는 인격적 상승으로 승화되고 있다. 여기에 유교적인 도덕적 인격과 신선사상과 민간신앙이 혼합되어 있음을 본다.
또한 최제우에게는 ‘성경’ 등 유교적 덕목의 실천을 강조하면서도, 그러한 윤리적 인격화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주리설(主理說)이 아니라, 주기설(主氣說) 위에 세우려고 한 흔적이 뚜렷이 엿보인다.
이 점에 관하여 동학사상에서 ‘천주’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하는 마음, 불택선악(不擇善惡)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지공무사한 존재로서의 천주는 주리설에서의 이(理)의 지배에 의한 차등 있는 계층적 존재론에서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주기설에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기화(氣化)의 동일성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택선악’의 근거이다. 그러나 최제우의 동학은 주자학의 주리(主理)의 자리에 천주를 대치하는 경천주의였다. 최제우는 우선 ‘지기’와 성인(聖人)과의 관계를 성리학적 사고의 틀에서 규정하고 있다.
<논학문>의 주문풀이에서 “지기에까지 화하여, 지성에까지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 때 ‘지성’, 즉 ‘성경’을 지키는 이상적 인격자에 이르는 방법으로 ‘지화지기’의 강령체험을 통한 인격전환의 높은 깨우침의 경지를 들고 있다.
성인군자와 소인의 구별에 관한 그의 개념은 주자학적 인성론(人性論)에서 빌어온 것임은 의심할 바 없으나, 최제우는 서민들, 즉 세상 사람 누구나가 도성덕립(道成德立)하여 성인군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데 근대시민정신의 선각자로서의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군자는 기가 바르고 마음이 정하여진 고로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이 합일된다고 하였고, 소인은 기가 부정하고 마음이 정해지지 않아 천지와 그 명(命)이 어긋난다고 하였다.
강령주문에서 시자(侍者), 즉 천주를 모신 심적 상태를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야.”라 하였을 때의 ‘불이’란 바로 심유정(心有定)과 같은 뜻이다. 또, 항상 강조하여 동학의 근본원리로 내세우는 ‘수심정기(守心正氣)’ 역시 성리학에서의 군자의 덕을 쌓은 상태와 다를 바 없는데, 다만 그 군자적 인격을 양반층 이외의 모든 서민들에게 열려진 길로 인정한 것이 특색이다.
특히, ≪동경대전≫은 한문체로 유학자들을 대상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적 개념체계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논하고 있으며, 결국 서민과 상인(商人), 수공업자도 시천주사상을 통하여 모두 지성(至聖)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동학이 유교나 불교에 기초를 둔 유교갱신의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고 성리학적 개념체계를 원용하였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개념체계를 이용하여 유교나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불교나 유교는 운이 다해 무력해졌고, 시운관(時運觀)의 관점에서 쇠퇴기에 접어든 것으로 예단하고 있다. 그 전에도 유교의 기본 사상인 삼강오륜·인의예지·원형이정(元亨利貞)·성경이자 등을 들고 있으며, 공자를 선성(先聖)으로 받들기를 잊지 않는다.
<수덕문 修德文>에서 “인의예지는 선성이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인의예지’를 선성의 가르침으로 일단 긍정하여 놓고, 자신의 각도인 ‘수심정기’도 역시 자기의 독창이 아니라 다만 자기의 ‘갱정(更定)’이라 하였으니, ‘인의예지’의 실천을 다시 강조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최제우 자신에 의하여 주장된 ‘수심정기’는 성인이나 군자와 같은 도덕적 인격수양을 위한 주관적 방법으로서의 수양방법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적 탐구면은 부정되고, 유교적인 고전 교양 없이도 오직 ‘수심정기’의 내면적 수양만으로 누구나 ‘도성덕립’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만민평등사상을 설파하였다.
‘수심정기’의 수양법은 유교와 불교뿐만 아니라 천주 등 보편자를 만인이 주체적으로 내면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소외되었던 서민들이 ‘시천주’의 신앙을 통하여 우선 인격적 자기동일성을 얻고 자아를 자각하여 개인격(個人格)의 존엄성의 바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최제우는 ‘도성덕립’을 위하여 객관적인 방법보다는 오히려 마음공부[心學]의 주관적인 수양법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민들에게는 오랜 경전학습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처럼 최제우는 동학에 유교의 근본정신을 심학(心學)면에서 계승하면서도, 그것이 입신출세를 위한 관학(官學)으로 타락하여 오랜 학습과정으로 인해 소수의 특권적인 양반자제들의 독점물이 된 점을 비판하고 있어, 십 년을 공부해도 속성이라 한다고 꼬집은 것이다.
이에 비하여 동학은 “삼년불성되게 되면 그 아니 헛말인가.”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동학을 모든 서민의 군자화의 길을 마련한 학(學)으로 권장하고 있다.
특히, 시천주사상은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각기 보편자 천주를 내면화하게 되고, 따라서 양반과 상민, 대인과 소인의 본질적 차등은 인정할 수 없게 되어, 만인이 군자가 될 수 있는 신분평등의 이념이기도 하였다.
<교훈가> 중의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한단 말가.”에서 보듯이, 천주를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네 몸에 모셨으니’가 곧 그의 시천주의 뜻이다.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신다는 것은, 첫째로 각 개인이 시천주의 인격적 존엄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과, 둘째로 천주를 모시는 시천주신앙을 통하여 비로소 인격적 존엄성을 얻게 된다는 두 가지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학에서와 같이 천주를 멀리 천당에 있거나 초월적인 존재로 보아, ‘사근취원한단 말가’와 같이 멀리서 구하지 말고 각자가 스스로 천주를 모신 경천의 주체임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최제우의 단계에서는 아직 인간이 곧 천이라고 하는 ‘인즉천’·‘인내천’의 범신론적인 범천주의(汎天主義)에까지 세속화되지는 못하고, 다만 인간 위에서 만물을 주재하는 상제(上帝)로서, 혹은 경외지심의 대상으로서 한울님(천주)이 모셔지고, 때로는 천주를 모신 신비적 경험의 자각상태에 머물렀다.
이상과 같은 동학사상이 동학농민운동에 그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려니와, 근대적 개인의 인격적 존엄성에 대한 근대 시민적 평등사상의 기초를 주고, 대인관계에서 상하·주종의 지배·복종관계로서가 아니라 대등한 횡적인 인간평등관계를 가르쳐 줌으로써, 동학이 근대적 사회관의 선구적 사상의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동학사상은 신분적 차등에서 벗어나 근대적 평민의식의 대두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최제우가 순교한 뒤 교통을 이어받은 최시형은 지하에 숨어 다니면서 포교에 힘쓰는 한편, ≪동경대전≫을 간행하는 등 교리를 확립하였고, 조직을 강화하여 동학의 완성을 이룩하였다. 그의 시대에 이르러 보편자인 천·천주는 더욱 세속화되어 ‘만인과 만물이 천이다.’라는 범천론적인 경향을 갖게 된다.
왕조사회의 신분질서에서 오는 차별제도도 최시형의 ‘물물천 사사천’의 사상에서는 그 차별의 근거가 사라지고, “사람을 한울처럼 섬긴다.”는 인간존엄의 가르침이 더욱 뚜렷해진다. 인간을 대할 때 상민도 양반이나 다름없이 한울처럼 섬긴다는 가르침은 양반사회의 신분 차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는 “성·경 두 자를 잘 지키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한울 공경, 사람 공경, 사물 공경의 3경을 강조하였다. 이 3경설에서 ‘경’의 대상을 ‘천’과 ‘인’에서 ‘만물’로까지 확대한 점에 유의할 때 자연보호와 환경윤리의 선각을 인정할 수가 있다.
‘경물’이란 동물을 애호하고 새소리도 한울의 소리로 들으라는 그의 가르침에서 자연보호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에까지 시천(侍天)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최시형의 범천론은 양반사회에서 천시당했던 노동과, 일반 세속사 전반에 대하여 천주를 위하는 덕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에 대하여 그는 “사람이 그저 놀고 있으면 한울님이 싫어하시니라.”고 한 점에서 세속적 근로와 직업을 신성화한 근대적 세속윤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천이 천을 먹는다[以天食天].”의 설법은 인간의 식생활 행위도 ‘천이 천을 먹는’ 행위로 신성화하였고, 일상생활의 규범을 범천론적으로 재정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세속윤리는 부녀자에게 보낸 ≪내수도문 內修道文≫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양천주의 설법 역시 온갖 탐욕을 물리치고 도덕적 인격을 닦는 일이 내 몸에 모신 천주를 양(養)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온갖 욕망을 자제하고 마음을 정(定)하면, 그것이 양천주가 되고, 양천주로 한울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고 설파하여, 선민들도 양천주하면 성인이나 군자가 된다고 하였다. 최시형의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주장은 그의 ‘인즉천’사상의 극단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제사상을 놓을 때 신위를 향하여 향벽설위(向壁設位)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가 제안한 ‘향아설위’는 천주를 모신 나 자신을 향하여 젯상을 놓자는 것이다.
조상이나 스승에게 제사를 지낼 때, 부모님의 정령은 자손에게 전해 왔고, 스승님의 정령은 제자에게 옮아 왔으므로 그 제사를 위해서는 자아를 향하여 설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이 설법에서 최시형은 “사람이 천령(天靈)을 모셨으니 신이 곧 내 마음이요, 예(禮)는 내 마음의 기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최시형은 동학사상의 실천에서 종교적 포교와 교문의 확대, 교의 공인, 교조의 신원에만 전념하였으나, 동학사상의 전파는 당시의 사회상으로 보아 필연적으로 농민운동에 들어가 혁명을 잉태하게 되어 제폭구민과 척양왜(斥洋倭)의 정치적·사회적 개혁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동학 교문은 1860년 창도 당시 교조 주위에 자연발생적으로 신자조직이 생겼다. 이 종교집단은 주로 글을 아는 잔반(殘班)의 식자층과 널리 서민층으로 구성되고, 민간신앙의 전파 통로로 신앙적 결집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최제우는 창도 3년 만에 많은 입신자를 얻어 각처에 접소(接所)를 두고, 그 지방의 유지를 접주(接主)로 삼아 교세를 늘려 나갔다. 동학의 포교는 경주를 비롯하여 영덕·고성·영일·단양 등 경상도 산간지방에 번져 나갔다.
최시형 시대에 접어들어 교세는 더욱 늘어나 전라도·경상도·충청도·강원도 등 삼남 각지로 번져, 접포(接包)의 교단조직이 생겼다. 즉, 각처에 접소가 있고 접주가 그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지방의 읍단위에는 대접주를 두었고, 일종의 교구제와 같은 포(包)를 두어 대접주로 하여금 포주를 삼아 예하의 접주를 감독하게 하였다.
포에는 행정기구를 이루는 6임제라 하여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여섯 가지 부서를 두었다. 교단을 총괄하는 중앙기관으로 충주에 법소(法所)를 두었고, 각 지방에 도소(都所)를 두어 도접주가 있는 곳도 있었다.
접과 포의 차이에 대해서는 접은 교화적인 것이고, 포는 행정적인 조직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접이 모여 포가 이룩된다는 견해도 있다.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조직을 총동원한 것을 기포(起包)라고 하였는데, 포 조직을 총동원하였다는 뜻이 된다.
동학의 조직원리는 연원제(淵源制)이다. 도통연원(道統淵源)이라 하여 도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가 연원주가 되고, 그에 의하여 포교된 신자들을 자기의 연원으로 간주한다.
유교에서의 사제지간이 같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급문(及門)의 제자들이 연원이 되는 것과 같이, 동학의 조직에서도 1에서 3, 3에서 10, 10에서 50 등으로 나뭇가지처럼 연원의 점조직이 문어발 모양을 이룬다.
예를 들어 누구인가가 아래로 여러 사람에게 동학의 심법(心法)을 전수하여 연원이 되고, 그 입신자들이 각기 연원주가 되어 다시 입신자를 만들었을 때, 위의 연원주는 접주가 된다.
이러한 접들을 이번에는 지역별로 크게 묶어서 포를 이루니 이것이 설포(設包)이다. 농민혁명 때에는 이 교구조직이 동학군의 부대편제로 그대로 이용된 것인데, 대접주들의 부대의 군단을 포라고 지칭하였다. →동학운동, 천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