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성 ()

박희성
박희성
유교
인물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회의와 진리』 등을 저술한 철학자.
이칭
격암(格巖)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88년
본관
미상
출생지
함경남도 홍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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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회의와 진리』 등을 저술한 철학자.
개설

호는 격암(格巖). 함경남도 홍원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함흥 영생중학교 재학 중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함흥고등보통학교와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1928년 도미하여 알비온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다시 미시간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1937년「주관주의와 직관」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의 내용은 흄(Hume, D.)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주관주의를 극복하는 데 직관이 필요하다는 논지였다. 그 뒤 직관의 문제에 대한 박희성의 관심은 철학과 아울러 심리학의 연구에 몰두하게 하였다. 그러나 박희성의 철학에 대한 일관된 입장은 경험론의 정신이었다.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미국의 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에서 심리학과 영어를 강의하였고, 그 후신인 고려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하여 영미철학을 우리 철학계에 전파한 선구자가 되었다. 박희성이 평생동안 학적 관심으로 가진 문제는 ‘민족의 문제’와 ‘생명의 문제’였다.

박희성은 남다른 애국애족의 정신을 가지고 민족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고 지적 탐구를 계속하였다. 얼마 남기지 않은 박희성의 유고에는 ‘민족의 문제’가 있으며, 민족의 불멸에 대한 강한 민족주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박희성의 교육자적 인격은 항상 세속을 멀리하고 진실한 가치를 실천하려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인격적 감화와 아울러 과학적 탐구와 엄격한 경험의 뒷받침을 존중하는 경험론적 자세 속에 드러난 철저한 회의의 비판정신을 갖고 있었다. 정년 후에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로서 철학강의를 계속하였다. 절약과 검소한 생활로 저축한 수억의 유산으로, 유지에 따라 장학재단이 설립되었다. 유고집으로 『회의(懷疑)와 진리(眞理)』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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