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 ( )

목차
관련 정보
근대사
단체
1926년 10월 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원세훈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이칭
이칭
대독립당북경촉성회
단체
설립 시기
1926년 10월
설립자
원세훈|장건상|박건병|배천택|신익희|조성환|황욱 외
설립지
중국 베이징
발간지
앞잡이[導報]
내용 요약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는 1926년 10월 28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원세훈(元世勳)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창조파(創造派), 흥사단원(興士團員) 등이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유일당(民族 唯一黨) 결성을 목표로 만든 단체로서, 중국 관내 각지에 다수의 촉성회를 만들어 ‘대독립당(大獨立黨)’을 결성하려 하였다. 1927년 상하이[上海], 광둥[廣東], 우한[武漢], 난징[南京]의 촉성회 설립에 큰 자극을 주며 민족유일당운동을 주도하였지만,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대립 고조 등으로 실패하였다.

목차
정의
1926년 10월 28일 중국 베이징에서 원세훈 등이 주도하여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변천 및 현황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의 개혁 방안을 위해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창조파 원세훈, 신숙(申肅) 등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임정을 만들려다 무산된 상태였다. 이들은 1925년 3월 초 독립기념일을 기념해 발간한 신문 『앞잡이[導報]』[^1]를 통해 민족유일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1926년 가을, 원세훈은 베이징에 온 안창호(安昌浩)와 민족유일당 조직을 논의하였고, 원세훈의 의견대로 각 지방에 독립단(獨立團)의 세포를 설립해 이들을 통일해 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총 3차례의 회의 끝에 1926년 10월 28일 원세훈 등 23명은 대독립당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를 발족하고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촉성회 참여자들은 원세훈, 강구우(姜九禹), 김광선(金廣善), 김운파(金雲坡), 김유성(金有成), 김인제(金人濟), 김일성(金一成), 김찬(金贊), 김해산(金海山), 권경지(權敬止), 장건상(張建相), 이광(李光), 이찬(李贊), 박건병(朴健秉), 박해관(朴海觀), 배천택(裵天澤), 송호(宋虎), 배운영(裵雲英), 신익희(申翼熙), 윤국초(尹國憔), 원흥(元興), 조성환(曺成煥), 황욱(黃郁)[황일산(黃一山)]이다.

이들은 원세훈의 창조파, 안창호의 흥사단 단원, 주2 사원, 영남 출신으로 구성된 국민당(國民黨)의 당원, 천도교인, 유림계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동일한 목적, 동일한 성공을 위하여 운동하고 투쟁하는 혁명자들은 반드시 하나의 기치 아래에 모이고 하나의 호령 하에 모여 개시하여야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며 유일당 운동을 촉구하였고, 각지에 다수의 촉성회를 만들어 ‘대독립당’을 결성하자고 하였다. 촉성회는 결성 초기 73명의 회원을 보유하였다.

대독립당북경촉성회는 다른 지역의 유일당 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1927년 4월부터 상하이, 광둥, 우한, 난징에 촉성회가 설립되었다. 11월 9일에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촉성회를 주도했던 원세훈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고, 점차 회원이 감소되면서 자금도 부족해졌다. 게다가 사회주의 세력의 유일당 전선 이탈,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대립 고조 등으로 촉성회의 민족유일당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단행본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5: 3 · 1운동사 재판 기록』(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4(국사편찬위원회, 1968)

논문

조규태, 「1920년대 북경지역의 흥사단원과 민족운동」(『대구사학』 142, 대구사학회, 2021)
조규태, 「원세훈의 임시정부 수립변혁 활동과 민족유일당 운동(1919~1927)」(『숭실사학』 29, 숭실사학회, 2012)
조규태, 「1920년대 중반 在北京 創造派의 民族唯一黨運動」(『한국민족운동사연구』 3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3)
주석
주1

『앞잡이[導報]』는 1925년 3월 1일 창간되었다. 발행지 · 발행소는 베이징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 발행인은 원세훈(元世勳)[별명 주계훈(朱啓勳)]이다. 이 신문은 원래 일간지로 발간하려고 했으나 자금 사정상 제2호부터 주간, 순간(旬刊), 월간의 형식으로 계속 발간되었다. 창간 당시의 인쇄부수는 500부였는데, 이 중 상당수의 양이 해외에까지 배부되었다. 즉, 100부는 베이징 지역의 유지들에게 배부되고, 그 나머지는 러시아 노령(露領) 지방의 윤해(尹海) 앞으로 100부, 서북간도(西北間島) 지방의 신숙(申肅)과 김동삼(金東三) 앞으로 100부, 일본과 조선에 100부[일본 지역은 동경유학생회와 동경선인청년회 앞으로, 조선은 개벽사 · 동아일보사 · 시대일보사 · 조선일보사 앞으로], 하와이 지역과 상하이 지역에 각 50부씩 배부되었다.

주2

1924년 창조파들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비난이 심화되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흑기연맹 소속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이 심화되자, 1924년 말 북경에 있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혁명사를 설립하였다.

집필자
윤상원(전북대학교 역사학과)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