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자연맹은 민족협동전선운동과 반파시스트정책 및 중국의 항전건국강령(抗戰建國綱領)을 지지하였다. 어떠한 형식의 독재에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정부와 국가가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민족혁명당과 보조를 함께 하였고,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중간·좌파세력과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약칭 민선)에 참여하였다. 이로부터 종래 견지해오던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반대입장을 유보하고, 협동전선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중 연합전선이 강화되면서 한인 독립운동의 환경이 호전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단결과 통일도 요구되었고, 이에 기존의 중국 관내 무정부주의세력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대신하여 조선혁명자연맹을 창설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과 보조를 함께 하였고,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중간·좌파세력과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약칭 민선)에 참여하였다.
단원은 20여 명이고, 주요 인물은 유자명(柳子明)·정화암(鄭華岩)·나월환(羅月煥) 등이었다. 1939년 11월충칭(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단원들을 상하이·베이징·톈진 등지에 파견하여 중국 민간항일세력과 특무공작을 전개했다. 정화암 등은 상하이와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 및 홍콩 등지에서 김구계열과 함께 활동하였고, 중국 무정부주의세력과도 연대하였다.
협동전선운동에 대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민족혁명당과 일치하였다. 두 단체의 공조관계는 중간좌파노선이라는 이념적 측면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이래의 의열단에서의 공동 활동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단일당’을 선호했고, 협동전선의 방법 및 조직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탄력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들은 “통일이 다른 어떠한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을 견지하였다. 이들은 협동전선의 성사가 양대 세력 즉 한국국민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참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고, 이 두 세력 간의 중간역할을 자임하였다.
1937년 12월 한커우(漢口)에서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등 좌파계열의 단체와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선언서를 발표, 좌익 정당의 통일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1939년 8월 쓰촨성(四川省) 치장(纂江)에서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민족전위동맹과 함께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에 참가하였고, 9월 성립된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陣線協會)에도 참여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으로 개편했다. 1942년 말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여 유림(柳林)과 유자명이 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전체적인 구성에 있어서 의석수와 세력에서 밀려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못하였다.
1920년대 이래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지지하면서 이 전선의 성사가 양대 세력 즉 한국국민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참가 여부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고, 이 두 세력 간의 중간역할을 자임하였다. 1930년대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등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좌익 정당의 통일에 일대 계기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