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3월 난징(南京) 한족회의 김성숙(金星淑)·손두환(孫斗煥)·김철남(金鐵男) 등이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동지 20여 명을 규합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중국 관내지역 한인독립운동전선의 통일·강화를 목적으로 활동했다.
1926년 전후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양 계통으로 나뉘어 통일전선운동을 개시했다. 1931년 10월 26일중국 상하이(上海)의 한국인들은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을 결성하고, 구연흠(具然欽) 등 10여 명의 지도 아래 창립 선언과 투쟁 강령을 선언하고 한글로 『아보라(阿普羅)』를 발간했다. 이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지지하면서 “중국혁명 대중과 합작, 단결한다”고 강조해 적극적으로 좌경 노선을 걸었다. 이후 이들 조직은 김원봉(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1936년 이후 일부 인사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부터 이탈했다. 마침내 같은 해 3월난징(南京) 한족회의 김성숙(金星淑)·손두환(孫斗煥)·김철남(金鐵男) 등이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동지 20여 명을 규합해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이하, 동맹)을 조직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 집단으로 자처했으나, 제3국제공산당과의 관계는 긴밀하게 유지되지 못했다. 이때 중국의 항일혁명군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동맹은 김규광(金奎光)·박건웅(朴健雄)·장명(張明) 지도 하에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에 가입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8년 5월 기관지 『신조선(新朝鮮)』을 창간해 사회주의 선전에 주력했다.
1940년 동맹은 조선청년전위동맹 및 이정호(李貞浩)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朝鮮民族解放鬪爭同盟)을 결성하고 좌파 진영의 김원봉 등과 행동을 함께 하고자 했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조선청년전위동맹은 허베이(河北)로 갔고 중국공산당이 쫓겨간 옌안(延安)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충칭(重慶)에 남아 있던 세력은 동맹을 재차 회복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제휴하고자 했다.
충칭시대에 동맹원은 적었으나 각자의 능력과 의욕이 커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치적 입장에 있어서는 레닌(Lenin, U.)과 스탈린(Stalin, J.)노선의 실행자를 자처했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지지하기도 했다.
특히 청년전위동맹의 인사들이 동맹에서 이탈하자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항일혁명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모든 한국의 독립운동단체는 결합해 임시정부 아래에서 현 단계에서 우선 민족해방운동을 완성하고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민족해방 이후에 결행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사회주의세력은 이 때 민족주의세력과 긴밀한 합작을 위해 “임시정부·반일민주강령·태극기, 임시정부의 한국독립지도자 선배를 시종 옹호한다”는 등 4위 1체의 중심사상을 공동 노력, 실천하는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동맹은 1939년부터 민선(民線 :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과 같이 광선(光線 :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민족단일당 창당을 목표로 7당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진영의 광선(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인원이나 역량으로 보아 우세해지자 “민족주의를 위해 공산주의 조직을 포기할 수 없다”고 성명서를 낸 뒤 탈퇴했다. 미국 본토에서 참가한 한국인 단체가 김원봉의 좌파단체와 합작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동맹이 앞장서서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7일 충칭에서 좌우합작의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陣線協會)가 정식으로 성립, 선포되었던 것은 큰 성과였다. 이러한 단결을 깬 것은 좌파였다.
동맹은 1941년 12월 1일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 김성숙·박건웅 등이 참여하여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들은 1943년 5월 10일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한국애국부인회·한국청년회 등 10여 개 단체와 공동으로 재중국자유한인대회(在中國自由韓人大會)의 명의로, 전세계 반침략 각국 정부 및 국민에게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이들은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어야 되고 한민족은 당연히 자유민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