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년 6월 4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는 ‘규정’을 공포하는 동시에 이승만(李承晩)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대미교섭의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신임장’을 교부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1925년 3월 임시대통령직에서 탄핵·면직 처분을 받으면서 단절되었던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정상화 하는 한편 대미외교의 전면에 다시 나설 수 있었다. 주미외교부의 대외명칭은 그가 1919년 8월 ‘(구미주차)한국위원회’ 설치 당시의 ‘Korean Commission’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대미외교의 연속성을 살렸다. 주미외교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주미한국대사관으로 바뀌었다.
주미외교부의 활동은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 발발 후 본격적인 외교·선전활동에 나섰다. 이때 이승만과 더불어 외교부의 공식 위원으로 활동했던 사람은 정한경(鄭翰景)과 이원순(李元淳)이었다. 임병직(林炳稷), 장기영(張基永), 정운수(鄭雲樹) 등은 외교부의 무관보(military attaché) 또는 서기의 직함을 갖고 대외활동을 펼쳤다. 이승만은 외교부와는 별도로 미국인들로 구성된 한미협회라든가 기독교인친한회와 같은 민간단체를 만들어 미국 정부와의 교섭 및 선전업무에 활용했다. 외교부의 제반 경비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지원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주미외교부의 활동은 크게 보아 세 가지 방면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재미한인의 전시(戰時) 지위를 ‘적성외국인(enemy aliens)’으로부터 ‘우호국 국민’으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둘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공식 참전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따라 광복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받는 일이었다.
태평양전쟁기 주미외교부의 활동은 미국 정부의 한국임시정부 불승인방침으로 말미암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한국 독립의 당위성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