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친우회는 1919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처음 조직된 후 미국 내의 주요도시―즉 워싱턴, 뉴욕, 콜럼버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캔사스시티, 보스턴 등―로 확산되었다. 그 본부는 워싱턴 D.C.(732 Woodward Building)에 자리잡았으며, 선교사 벡(S. A. Beck)이 전국을 총괄하는 집행서기직을 맡았다.
1920년 10월 26일에는 영국 런던의 하원(下院) 의사당에서 한국친우회가 창립되어 하원의원인 뉴만 경(Sir Robert Newman)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이어서 프랑스 파리에서도 친우회가 결성되었다.
이처럼 조직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위원장 李承晩)와 그 산하 필라델피아통신부(부장 徐載弼), 그리고 파리 및 런던통신부(서기장 黃玘煥)의 체계적인 선전활동과 각처 유학생 및 교민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의 ‘규약’에 명시된 목적을 보면, (1)기독교와 자유로운 독립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한국민에 대한 동정과 도덕적 지원의 확대, (2)한국민이 더 이상 학대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호의적 중재와 영향력 행사, (3)미국인들에게 한국 내의 실상을 알리는 홍보활동, (4)모든 인종간의 친선과 항구적 평화 및 형제애를 촉진시킴으로써 전세계에 ‘하나님의 법률’이 확립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등이었다. 회원은 친우회의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정회원과 재정적으로 이들을 뒷받침하는 찬조회원, 그리고 종신회원 등으로 나뉘어졌다.
1921년 6월 28일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의 회장인 톰킨스(Floyd W. Tomkins)목사는 주미일본대사 시데하라(幣原喜重郞) 남작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친우회는 미국 내 21개 도시에 2만 5천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면서 일본제국의 명예와 미·일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위하여 한국민이 스스로 그들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희망했다. 이 무렵 일본측 보고서에서는 한국친우회의 회원이 3천명을 넘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어느 쪽이든 일본의 한국병합 후 잊혀졌던 ‘한국문제’가 3·1운동을 계기로 다시금 서양인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