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충청남도 금산(錦山) 출신. 일택(逸澤)의 장남으로 향리에서 국민학교를 마친 뒤 중국 상하이를 거쳐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노동을 하며 나성고등학교(LA High School)를 졸업한 후 하버드, 콜럼비아, 조지 워싱턴, 남가주대학 등에서 공부를 했다. 1928년 5월 고향 선배인 송철(宋哲)과 함께 ‘케이 앤드 에스 자버(K & S Jobber, 김용중·송철 도매상)를 차려 로스앤젤레스 시장에서 각종 과일·채소를 위탁 판매하면서 사업가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해인 1939년 1월 북미(北美)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선임되면서 미주한인사회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41년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겸 선전과장이 되는데, 그 해 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활동무대를 워싱턴 D.C.로 옮겨 본격적인 대미 선전활동을 개시했다. 1943년 중반에는 독자적으로 한국사정사(Korean Affairs Institute)를 설립하고 『한국의 소리(The Voice of Korea)』라는 반(半) 월간 영자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한국의 사정을 소개하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해방 후 한반도에 미·소 양군이 진주하고 국토가 분단되자 ‘중립화통일론’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일론은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세력의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었는데, 내용적 측면에서 보면 1950년대 유엔(UN)·중립국 등 외부세력의 역할을 중시하는 것에서부터 4·19를 거치면서 민족구성원 내부의 주체적 입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는 민족자주성에 기초한 통일된 조국, 그리고 민주화된 조국의 염원을 안고 세상을 떴다.
2000년 독립유공자로 포상(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