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는 미주에서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가 개최되는데, 이때 서재필(徐載弼)은 미국 내에서 일본의 조직적이며 대대적인 왜곡선전에 대항하여 한국문제에 대한 공정한 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 회의가 끝난 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서재필을 외교고문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대한민국통신부는 설립될 수 있었다. 초기의 조직 구성을 보면, 부장에 서재필, 서기에 박영로, 외교협찬원에 정한경(鄭翰景)·베네딕트(G. Benedict, International News Service 기자), 구터펠(Miss Guthaphel, 선교사) 등이었다. 통신부의 운영비용은 1919년 9월까지 국민회가 담당하다가, 10월부터는 구미위원부를 통해 매월 800달러 내외를 지원받으면서 그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통신부의 설립 당시 서재필이 밝힌 활동 방향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책자 발간을 통한 출판·선전활동이고, 둘째는 대중집회를 통한 강연활동이며, 셋째는 미국인들이 조직하는 친한단체의 활동 지원이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월간잡지인 『한국평론(Korea Review)』이 발행되는 한편, ‘한국친우회’의 조직이 미국 내 주요도시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국평론』의 간행 부수는 매회 2,500부 정도로서, 미국 정부기관과 대학·교회 등에 무료 배포하고 일반 독자들로부터는 구독료(일년 2달러, 1부는 20센트)를 받았다. 이같은 활동을 통하여 통신부가 미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했던 것은, 한국문제는 ‘모든 극동문제의 요체(the pivot of all Far Eastern questions)’이며 한국문제의 올바른 해결만이 극동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3·1운동 후 미국 내의 대표적인 선전기구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통신부는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 1921. 11.12~1922. 2. 6)에 한국문제를 상정하는 데 실패한 후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