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소약속국동맹회의(小弱屬國同盟會議)는 1917년 10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3일간 뉴욕의 맥알핀호텔(McAlpine Hotel)에서 열렸다. 이때의 회의는 세계의 약소국과 속국 그리고 억압받는 민족들의 ‘영원한 의회(a permanent congress)’로 성립된 것으로서, 이번 전쟁이 끝난 후 개최될 평화회의 및 각종 국제회의에 약소민족들의 대표가 출석하여 그들의 이해에 영향을 미칠 문제들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할 권한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 회의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파견한 박용만(朴容萬)이 참석했는데, 그의 역할과 활동상에 대하여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2차 동맹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인 1918년 12월 14일부터 이틀간 뉴욕의 맥알핀호텔과 자유극장에서 열렸다. 이 회의를 앞두고 대한민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미지방총회의 임원 및 유지인사들과 협의한 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1) 파리평화회의와 소약국민동맹회에 한인 대표자 3명을 파견한다. (2) 한인 대표자는 이승만·민찬호·정한경으로 한다. (3)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에 참여한 각 국민이 파리평화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는 경우에는 한인 대표자 1명도 그들과 함께 파견한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민찬호와 정한경이 제2차 동맹회의에 참석했다.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은 그 회의가 끝난 후 대표단에 합류하여 파리평화회의에의 출석을 도모하지만, 미국 정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한편, 뉴욕의 신한회(The New Korea Association, 회장 申聲求)라는 단체 또한 11월 30일에 총회를 개최하여 ‘독립결의서’를 채택한 뒤 미국 국무부와 하원 외교위원장에게 수교하는 동시에 김헌식(金憲植)을 제2차 동맹회의에 출석시켰다. 이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하여 레토니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알바니아, 앗시리아, 그리이스, 인도, 아일랜드, 페르시아, 스코틀랜드, 우쿠라이나, 트란스발의 대표들이 참석했는데, 김헌식이 집행위원회의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하여 민족자결을 주장했으며, 장차 설립된 국제연맹에도 정회원으로 가입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선포했다.
제2차 소약속국동맹회의의 개최를 앞두고 미주한인사회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소식은 연합통신(AP)을 통하여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고베(神戶)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저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zer)』지에 「한국민들 독립을 주장」,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러한 신문 보도에 접한 재일유학생들은 은밀히 독립운동에 착수했고, 이것이 2·8 독립선언으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이 선언은 3·1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