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행인(杏仁). 서울 출생.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고희동(高羲東)의 지도를 받았다.
졸업 후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 내의 고려화회(高麗畫會) 소속 장발(張勃)·안석주(安碩柱)·구본웅(具本雄) 등과 같은 화우 문하생으로 수업을 하였으며, 일본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畫學校)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제4회부터연속 4차례나 특선하였다.
신극단 토월회(土月會)에 가입하여 무대장치를 전담하다가 1928년『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로 신문 연재소설 삽화를 전담함으로써 『동아일보』이상범(李象範), 『중앙일보』노수현(盧壽鉉)과 함께 광복 전 삽화계 3천왕(三天王)으로 알려질 만큼 신문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박종화(朴鍾和)작 역사소설 『금삼(錦衫)의 피』(1935) 삽화를 그리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광복 전후 박종화와 명콤비를 이루어 『조선일보』 연재소설 「임진왜란」(1954∼1957)·「세종대왕」(1969∼1975) 등 풍속화풍의 삽화를 도맡아 삽화계 원로가 되었으며, 만년에 삽화가협회회장에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