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교장은 최창학(崔昌學) 소유의 별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金九)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이후부터 1949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생활하던 사저 겸 집무실이었다. 당시 그 일대의 명칭이 다케조에마치[죽첨정(竹添町)]여서 건물 이름을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정치 활동이 본격화되자 ‘서대문 경교장’이라 불렀다.
경교장은 광화문에서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 즉 지금의 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강북삼성병원(구 고려병원) 자리에 위치해 있다. 연면적 945.45㎡의 지상 2층, 지하 1층의 단아한 양관으로,근대 건축가인 김세연(金世演)이 설계하여 1938년에 완공하였다.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고 1층의 출창(出窓)과 2층의 들임 아치창을 이용한 외관이 특징이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뿐만 아니라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 · 건국 · 통일운동의 민주적 총본산격이어서, 이승만(李承晩)의 돈암장 혹은 이화장, 김규식(金奎植)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정부수립 이전 건국활동의 3대 요람으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임시정부의 공관으로 상당기간 활동본부 구실을 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운 민족주의 추구의 우국 정객들이 모여든 경교장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활동이나 건국실천원 양성에 주안점을 둔 보루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곳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구 휘하의 엄항섭(嚴恒燮) · 조완구(趙琬九) · 조소앙(趙素昻) · 조성환(曺成煥) 등이 정사를 주재하였다. 그리고 자주적 통일운동이 본격화되기까지 광복 후 이곳에 많은 인사들이 집결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시해된 뒤 국민장을 거행할 때, 당시 거족적인 애도 인파가 몰린 명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전독립과 통일지향의 역사적인 영광과 시련이 교차된 경교장은 주인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1968년 삼성재단이 매입하여 고려병원(1995년 강북삼성병원으로 개칭)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경교장은 복원공사 후 2013년 3월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