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한국근대건축 초기에 신교육을 받은 건축 2세의 한 사람이다. 1920년에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뒤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1941년 퇴직할 때까지 고용원(雇傭員)·기수(技手)·기사(技師)를 거치며 20년간 큰 활약을 하였다.
또한, 한국인 최초의 구조계산 전문가 역할도 하며, 1930년 『조선과 건축』 잡지에 「곡축(曲軸)을 갖는 철근콘크리트구재의 응력」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신건축가 박길룡(朴吉龍)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1943), 그의 사무소인 박길룡건축사무소의 경영을 인계받았다.
이 시기에 그가 참여하였던 순수 건축설계 작품으로는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 일부와 강당, 1938년의 최창학저택 경교장(京橋莊 : 지금의 삼성강북병원)이 있으며, 옛 중동중고등학교·휘문고등학교와 풍문여자중고등학교 등의 학교교사 일부가 있다.
구조계산전문가로서 그는 화신백화점·신세계백화점·미도파백화점의 구조계산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조선건축기술단(지금의 대한건축학회)을 창설하여, 초대단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조선건축사협회 고문, 조선토건협회 초대회장(1946)을 맡으며 광복 전후의 혼란시대에 초석을 놓는 구실도 하였다. 1948년에는 김세연 건축사무소를 개소하여 대한극장·중앙청제2별관과 옛 국학대학의 설계와 공사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