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연암(然庵). 강원도 삼척출생. 1922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하였으며, 1925년 졸업과 함께 바로 전라남도청의 기수(技手)로 발령받아 광주로 내려갔다. 당시 광주는 선교사에 의하여 교회와 학교가 건립되고, 일본인에 의하여 은행 · 관청들이 조금씩 늘어나던 때였다.
1928년에는 ‘조선풍 주택설계도안 현상모집’에 응모하여 2등으로 당선되어 그의 건축적 의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이 가운데 전남도청회의실 건물이 1981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어 현재 보존, 관리되고 있다.
그뒤, 서울로 올라와 광복될 때까지 조선총독부를 거쳐 조선주택영단(대한주택공사의 전신)의 기사로 있으면서 주택 · 공공건축 등의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심혈을 기울였으며, 일본인들로부터 신기술을 도입하여 흡수, 소화시키는 데 남다른 교량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건설업체에 투신, 그 일선에서 활약하였으며, 대한건축사협회 이사장직(1955)을 비롯하여 정부 여러 부처의 기술자문역을 맡았다. 1965년 대한건축사협회의 발기인으로 창립회장이 되어 한국 건축사계(建築士界)에 초석이 되었으며, 그 공로로 1986년 대한건축사협회로부터의 공로패를 사후에 증정받았다.
한국근대건축의 원로로서 건축사의 진로개척에 공헌한 그의 건축작품은 섬세하고 우아한 것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광주근무시절에 설계한 전라남도청사(1932)와 같은 청사내에 설계한 전라남도평의원회의실(1932)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