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극장 ()

동양극장
동양극장
연극
단체
1935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연극전용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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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동양극장은 1935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연극전용극장이다. 평양 출신의 홍순언이 무용가인 아내 배구자와 함께 서대문구 충정로에 설립했다. 신파극의 토착화에 주력했다. 연출가와 배우들의 전속 극단인 청춘좌를 결성했다. 이후 시대극을 공연하는 동극좌와 신파극의 모체가 된 희극좌를 창단했다. 1936년 희극좌는 동극좌와 병합되어 극단 호화선으로 재출범했다. 개관 뒤 10년 뒤 건물만 남은 대관극장으로 전락하였다. 동양극장은 연극의 대중화, 창극의 정립, 대중 극단 탄생의 기반 제공, 극단의 직업의식 자극, 고정 관객의 확보 등을 통해 연극의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정의
1935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연극전용극장.
개설

동양극장(東洋劇場)은 평양출신의 홍순언(洪淳彦)이 아내이자 무용가인 배구자(裵龜子)와 함께 서대문구 충정로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이다. 이 극장은 당시 홍순언의 재산 4천원과 홍순언이 일본인 와께지마 요로시의 도움으로 상업은행에서 빌린 19만 5천원을 합한 자금으로 세워졌다.

조선극장(朝鮮劇場) · 단성사(團成社) · 우미관(優美館) 등의 극장들이 주로 영화상영 · 음악회 · 가극대회를 위주로 하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동양극장의 설립은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극장의 규모는 대지 488평, 건평 373평(2층 포함)으로 객석은 648석이었다. 시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회전식 무대에다 호리촌트(horizont)를 갖추었고, 조명시설도 당시로서는 괜찮았을 뿐 아니라 무대 밑에는 기관실과 난방시설까지 갖추었다.

연원 및 변천

개관공연은 배구자악극단의 「멍텅구리 2세」, 촌극 「월급날」, 무용극 「급수부」, 그리고 20여 명으로 구성된 소녀관현악단의 무대연주 · 무용 · 독창 · 합창 · 뮤직플레이 등으로 구성되었다. 1930년대 초반부터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를 중심으로 일어난 서구 사실주의 연극의 토착화작업을 시도하려는 신극운동과는 달리 동양극장은 신파극의 토착화운동에 주력하였다.

동양극장은 또한 연출가와 배우들의 전속극단인 청춘좌(靑春座)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청춘좌에 참여한 사람들은 지배인 최독견(崔獨鵑) · 홍해성(洪海星) · 박진(朴珍) · 이운방(李雲芳) · 이서구(李瑞求) 등 연출가 및 작가들과, 박제행(朴齊行) · 서월영(徐月影) · 심영(沈影) · 황철(黃澈) · 김승호(金勝鎬) · 김선초(金仙草) · 차홍녀(車紅女) · 지경순(池京順) · 김선영(金鮮英) · 한은진(韓銀珍) · 유계선(劉桂仙) 등이었다.

‘청춘좌’는 그 해 11월 15일 최독견 작 「승방비곡(僧房悲曲)」, 이운방의 사회극 「국경의 밤」, 구월산인(九月山人) 작 「기아일개이만야(棄兒一個二萬也)」 등으로 제1회 창립공연을 가졌다. 전속배우들에게는 월급제를 실시함으로써 유능한 직업배우들을 영입하였고, 극작가 · 연출가 · 정치가들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연극사상 획기적인 일이었고, 일찍이 어느 흥행단체나 극단에서도 시도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청춘좌’에 이어 변기종(卞基鍾) · 송해천(宋海天) · 하지만(河之滿) 등을 중심으로 한 제2의 전속극단 동극좌(東劇座)가 창단되었다. 이 극단은 주로 시대극을 공연하는 목적으로 창단되었으며 1936년 2월에 창립공연을 가졌다. 이후 희극에만 전념한 제3의 전속극단인 희극좌(喜劇座)를 창단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희극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연극흥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이들이 종로권번한성권번에 속하여 있던 500여 명의 기생들이었다. 이들 기생들이 주로 화류비련극(花柳悲戀劇)과 가정비극류(家庭悲劇類) 등의 작품에 관심기 때문에 극작가들은 그들의 눈물을 자아내기 위한 작품을 써야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신파연극의 모체가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희극좌는 1936년 9월에 동극좌와 병합되어 극단 호화선으로 재출범되었고, 호화선은 청춘좌와 함께 동양극장을 대표하는 2대 극단이 되었다. 호화선은 음악부를 증설, 극과 음악의 조화를 꾀하는 등 단원을 보강하고 진용을 개편하여 9월부터 창립공연에 들어갔다. 그 뒤 두 개의 전속극단으로 연중무휴 전국 각지와 심지어 북만주까지 순회공연을 가졌다. 그로부터 3∼4년간 동양극장의 주인이 바뀌던 1938년까지 많은 작품들을 공연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대중의 인기와 여성 관객의 호응을 받았던 대표적인 작품은 임선규(林仙圭)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이서구(李瑞求) 작 「어머니의 힘」 등과 같은 작품들이다. 설립자 홍순언이 1938년에 요절하고, 이듬해 19만 원이 부도처리됨으로써 동양극장의 운영권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극장주가 바뀐 동양극장은 1939년 8월, 청춘좌와 호화선의 합동공연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고, 연기자들 중 단원 일부는 새로 창단된 아랑(阿娘)으로 옮겨갔다. 새로 극장의 지배인이 된 김태윤(金泰潤)은 본래 연극전문인은 아니었으나, 연극에 대한 애정이 대단해 문을 닫은 지 한 달 남짓 된 그 해 10월부터 동양극장을 다시 문을 열어 청춘좌와 호화선의 합동공연을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극장을 떠난 배우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신인배우양성을 위한 부설연극연구소의 연구기관을 개설하였다. 그 뒤 개관 6년 만인 1941년 11월에 전속극단 호화선이 성군으로 개칭되어, 또 한 차례의 혼란을 거듭하였다. 극단 성군은 청춘좌와 동양극장을 지키는 2대 쌍벽으로서 공연을 계속하여 광복직전까지도 상업극단의 전위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한편 동양극장은 전속극단 외에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 고협(高協) · 현대극장(現代劇場) · 국민좌(國民座) · 예원좌(藝苑座) · 아랑 · 신생극단(新生劇團) · 신무대(新舞臺) 등 많은 극단들에 대관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을 꾀하고 대중극장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이후 1946년에 극단 호화선이 재기해 동양극장에서 조향남(趙香南)의 「사랑을 팔아 사랑을 산 여자」로 재건공연을 가졌으나 같은 해 제7회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하였다.

이처럼 동양극장은 개관 뒤 10년,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역사를 간직한 채 실제로는 건물만 남은 대관극장으로 전락하였다. 그 후 이 극장은 6 · 25 전쟁 때 극장주 김태윤이 납북되면서 개성재벌이었던 이영균이 한때 운영하다가 1958년에는 사업가 김희덕(金熙德)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후 이 극장은 다시 영화관으로 사용하다 그것마저 1976년 영화계의 불황으로 완전 폐관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동양극장은 연극의 기술적 발전뿐만 아니라 직업극단화를 가능케 하는 등 우리 연극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또한 연극의 대중화, 신파극의 토착화, 창극의 정립, 대중극단 탄생의 기반 제공, 최고의 설비로 기존 극단의 직업의식 자극, 고정관객의 확보 등을 통해 연극의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 근·현대 연극 100년사』(한국 근·현대 연극100년사 편찬위원회, 집문당, 2009)
『한국 근대극장 변천사』(유민영, 태학사, 1998)
『우리극연구6』(김미도·이강렬·차범석, 공간미디어, 1995)
『한국 희곡사 연표』(민병욱, 국학자료원, 1994)
『한국연극사』(장한기,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6)
『한국극장사』(유민영, 한길사, 1982)
『한국연극사조연구』(장한기, 동국대학교 한국학연구총서 8, 아세아문화사, 1976)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5)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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