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홍재원(洪在遠). 대구 출생. 1920년 봄에는 김우진(金祐鎭)·조명희(趙明熙)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이 회원들이 주동이 된 동우회순회연극단의 일원으로서 조명희가 쓴 <김영일(金英一)의 사(死)>의 연출을 맡았다.
전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김우진의 권유에 따라 본격적인 연극인이 되기 위해 일본의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를 자퇴하고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로 적을 옮겼고, 동시에 일본 신극의 선구자 오사나이(小山內薰)의 문하생이 되었다. 1924년에 일본 신극의 산실인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이 서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극장의 전속배우가 되었다.
쓰키지소극장의 단역 배우로 있으면서, 1926년 5월에는 ≪조선일보≫에 김우진과 공동집필한 논문 <우리 신극운동의 첫길>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토월회의 실패를 분석하고, 또한 1920년대 신극운동의 문제를 다룬 중요한 평문(評文)이다.
김우진과 함께 서울에 연극전문극장을 짓고 본격적인 신극운동을 벌일 것을 설계하였으나, 김우진이 자살하자 실의에 빠져 단역배우로 활동하다가 1929년에 귀국하였다.
귀국하여 윤백남(尹白南)·박승희(朴勝喜) 등과 경성소극장을 조직하였으나 곧 유산되었고, 그 해 10월에는 극예술협회 회원이었던 고한승(高漢承)의 자금지원을 받아 극단 신흥극장을 조직하고 창립공연으로 <모란등기 牡丹燈記>(단성사, 1930.11.)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이 공연은 번역과 연출이 좋지 않아 실패하였다.
1930년 12월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실에서 체호프(Chekhov,A.P.)작 <벚꽃동산>을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1년에는 일본에서 가져 온 연극·영화관계 자료를 모아 해외문학파 회원들의 협조를 얻어 전람회를 열었다.
이 전람회를 계기로 하여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가 조직되자 창립동인으로 참여하였고, 강연·작품평·작품해설·연출 등 이론과 실제적 행동을 통해서 연극의 저변확대와 정통적 근대극 수립을 위하여 전력투구하였다.
극예술연구회에서는 무대수련을 쌓은 유일한 연출가였기 때문에 창립공연인 <검찰관>으로부터 제7회 공연까지 계속 연출하였는데, 1934년 말까지의 홍해성 연출 전담시기가 바로 극예술연구회의 제1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유치진(柳致眞)·서항석(徐恒錫)·허남실(許南實)·이서향(李曙鄕) 등이 그에게서 연출을 배웠다.
1935년에는 생활고로 지두한(池斗漢)이 이끌던 직업극단인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로 옮겨 <개화전야 開化前夜> 등 대중극을 연출하였다. 1935년 11월에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이 극장의 전속연출가가 되었고, 여기서 개량신파극을 리얼리즘기법으로 연출하려고 노력하였다. 1942년에는 과로로 인한 병때문에 동양극장을 그만두었다.
광복 후 1955년 7월에는 극단 민극(民劇)이 그를 위한 회갑기념공연을 시공관에서 열었고,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여 연출과 연기를 가르쳤다. 1957년 7월에는 국립극장의 환도기념공연인 쉔헤르(Schonherr,K.)작 <신앙과 고향>을 마지막으로 연출하였다.
그는 배우로 출발하여 연출면에서 우리 나라 근대극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극예술연구회를 통해서 스타니슬라브스키(Stanislavsky,K.S.)의 사실주의적 연출기법을 정립했고, 동양극장시대에는 신파극에 리얼리즘 연출기법을 도입해 토착화시키는 데 지대한 구실을 한 선구적 연출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