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변창규(卞昌圭). 서울 인사동에서 출생하였다.
계성학교(啓星學校)를 졸업하였다. 1912년 연흥사(演興社)에서 혁신단(革新團)이 공연한 신파극 「진중설(陣中雪)」을 보고 자극을 받아 연극에 몸담게 되었다.
1912년 11월 극단 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을 조직하여 지방공연까지 하였으나 평양에서 해산되자, 곧 이어 개성에 있는 유일단(唯一團)에 가입하여 배우로서의 기량을 닦았다.
유일단이 1914년 말에 해산되자 이기세(李基世)를 따라 예성좌(藝星座)에서 활동하다가 1919년 7월에 조선문예단(朝鮮文藝團)에 잠시 참여한 뒤, 1920년 4월에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新劇座)로 옮겨 연쇄극에 출연하였다.
박승희(朴勝喜)가 조직한 토월회(土月會)의 신극을 보고 자신의 연극에 통속성이 짙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파성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노인 역을 잘 한다는 평을 받았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연기자로서만이 아니라 연극계의 지도자로서 극단경영에도 주도적인 구실을 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 12월에는 이원규(李元奎)·강성렬(姜成烈)·김조성(金肇盛)·문수일(文秀一)·최성해(崔星海) 등과 함께 민립극단(民立劇團)을 창설하여 활약하였으며, 1926년 10월에는 이경환(李敬煥)·복혜숙(卜惠淑)·최성해 등 신파극의 인기배우들을 결집하여 조선극우회(朝鮮劇友會)를 창설하였다.
이 극단은 호남·서울·원산 등지의 공연을 끝내고, 북만주까지 가려고 함경남도 단천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1929년 12월에는 지두한(池斗漢)과 함께 신파극단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를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 11월에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그 전속극단 청춘좌(靑春座)의 대표적인 배우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극단 자유극장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51년 극단 상록극회의 동인으로, 1953년 5월 극단 자유극회의 창립동인으로, 1955년 8월 극단 민극(民劇) 창립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4월 예술원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57년 6월 국립극단 단장, 1957년 3월 서울시 문화위원, 1958년 10월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 1961년 12월 개편된 국립극단원 및 연극협회 고문, 1972년 1월 국립극단 명예단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서울시문화상·예술원상·연예공로상 등을 수상하였고, 문화훈장·국민훈장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초창기 신파극부터 연극 외길만을 걸어온 뛰어난 신파연기자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