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생. 어려서 서당에 다녔을 뿐,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20세 때에 일본공사관이 있던 남산의 종현성당(鐘峴聖堂) 뒷문 근처에 살면서 때마침 그곳의 일본인 극장에서 공연되던 신파극이나 가부키(歌舞伎)를 관람하고 외국의 새로운 연극에 눈을 떴다.
나중에 연극을 직접 배우고 실연해 보기 위해 일본인 극장인 수좌(壽座)에 잡역부로 취직하였다. 수좌에서 일본인들의 공연을 뒤에서 돕는 한편, 스스로도 신파극을 공연하기 위하여 동지들을 규합했는데 그들이 훗날의 혁신단(革新團)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수좌는 주로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오는 극단들이 사용하였기에 한 극단이 돌아가고 다른 극단이 오는 사이에 무대가 쉬는 날이 많았다.
그는 무대가 쉬는 틈을 이용해서 동지들과 함께 공연 연습을 하였다. 1911년 초겨울 그가 조직한 혁신단은 남대문 밖 어성좌(御成座)에서 창립공연을 가졌다. 창립공연의 비용은 신창안(지금의 남대문시장)에서 싸전을 하던 김치경(金致景)이 100원을 출자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 공연에서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식의 신파극을 공연하였다. 작품은 일본 신파작품인 <사(蛇)의 집념>을 번안한 <불효천벌 不孝天罰>이었다. 총수입은 5원으로 극장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액수였다.
작품의 수준, 무대의 조건, 관객들의 신파에 대한 인식 등이 모두 불리한 것을 깨닫고 이튿날 계속해서 공연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다음 공연을 준비했다. 일본인 신파극 배우 고마쓰(小松)를 초빙하여 신파연극의 내용에 관한 것, 인물분장법, 발성법, 연기술 등을 구체적으로 지도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봄에 재기공연을 갖고 <법지법 法之法>·<명호천명 鳴呼天命>·<육혈포강도 六穴砲强盜>·<진중설 陣中雪> 등을 공연하여 흥행에 성공했다. 1912년 3월에 문수성(文秀星)이, 같은 해 11월에 유일단(唯一團)이 생겨 혁신단은 그들 극단과 경쟁하면서 선구자적 위치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2차 공연 이후 혁신단을 이끌고 인천으로 순회공연을 떠나 가설무대를 만들어놓고 공연했는데, 이 공연을 계기로 인천에는 축항사(築港社)라는 극장이 세워지게 되었고 다른 지역에도 여러 차례 순회공연하였다.
1914년 초에는 교육기관을 위한 자선공연을 여러 차례 가졌고 걸인들을 위한 자선연극회를 열어 그 수입금으로 여러 차례 걸인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는 사회의식이 강했던 초창기 신파극의 선구자였다. 1914년 6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약 4개월간 일본 연극계를 살피기도 하였다.
그의 연극은 처음에 군사극, 탐정극, 신문기사를 각색한 실화극 등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차차 가정문제를 통속적으로 다룬 이른바 가정비극으로 바뀌어갔다.
<쌍옥루 雙玉淚>·<눈물>·<봉선화>·<장한몽 長恨夢> 등이 그 대표작들이다. 당시의 연극평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음을 볼 때 그의 연기에 과장이 많고 감상주의적인 색채가 짙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12월, 대규모 극장을 지을 계획으로 혁신단 단장직을 한창렬(韓昌烈)에 물려준 뒤 바쁘게 노력했으나 요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