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신파조(新派調)라는 이름으로 그 잔존 요소만이 보이고 있다. 20세기 초엽, 전통 판소리나 무용·음악·창극 등이 공연예술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무렵 신파극은 일본에서 수용되어 점차 확대되어갔으며, 1910년대 중반부터 공연물의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 신파극의 전개과정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서로 비슷한 경로를 보이고 있다. 1910년대 초기에 일제히 나타난 신파극단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민중계몽’을 내세웠다. 이러한 점은 일본에서 신파극이 성립될 때 자유민권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내세웠던 표어와 같으며, 군사극(軍事劇)·탐정극(探偵劇)이 초기에 많이 공연된 것도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의 신파극이 군사극으로, 전시의 오락극으로 변모된 영향을 그대로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적 목적극, 시사적 오락극에서 출발한 신파극은 뒤이어 소위 ‘가정비극(家庭悲劇)’이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로 정착되었는데, 이 경우도 일본과 같다.
대체로 무르녹은 연애, 엽기적인 사건 등 강렬한 정서적 자극이 있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대개는 주인공이 어려운 처지에 몰려 관중의 눈물을 자아내다가 끝에 가서 행복을 찾는다는 결말로 끝난다. 통속적인 윤리관에 입각한 권선징악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
일본의 신파극은 가부키(歌舞伎)에서 계승된 특이한 과장적 표현과 연출방식, 무대양식 등을 지니고 있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초창기에는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여 공연하였으므로 신파조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신파극단들이 내걸었던 ‘민중계몽’의 표어는 물론 상대적인 개념이기는 하나 명실상부한 성과로 기록될 수는 없다. 그것은 민중계몽이라는 것이 하나의 막연한 구호였을 뿐, 실제 민중을 계몽할만한 수준의 공연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연극사로 볼 때 신파극은 일제시대에 유행한 대중오락극(大衆娛樂劇)으로 규정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신파극은 1911년 11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에 의해 처음 공연되었다. 남대문 밖 어성좌(御成座)에서 공연된 작품은 일본의 <뱀의 집념 蛇の執念>을 번안한 <불효천벌 不孝天罰>이었다. 임성구의 첫 공연은 일본 신파극의 서투른 모방극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당시 서울과 지방에는 일본 거류민들이 그들의 거류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극장을 세워둔 것이 있었는데, 1908년부터 일본 신파극단들의 한국 순회공연 기사가 보인다. 공연된 작품으로는 <피스톨강도 청수정길 ピストル强盜淸水定吉>(1908.8., 歌舞伎座)·<독일토산 獨逸土産>(1909.6., 京城座)·<단장록 斷腸錄>(1909.6., 歌舞伎座)·<불여귀 不如歸>(1909.7., 歌舞伎座)·<조국 祖國>(1910.1., 壽座)·<불여귀>(1910.3., 壽座)·<뱀의 집념>(1910.3., 壽座)·<피스톨강도>·<단장록>(이상 1910.3., 京城座)·<소가노야의 희극 曾我迺家の喜劇>·<회진백호대 會津白虎隊>·<인육질인재판 人肉質人裁判>(이상 1910.3., 仁川歌舞伎座)·<인형지거 人形芝居>(1910.6., 御成座)·<불여귀>·<만주혈염의 지도 滿洲血染の地圖>(이상 1910.11., 壽座)·<황국백국 黃菊白菊>·<무스비초 むすび草>(이상 1911.9., 壽座)·<금색야차 金色夜叉>(1911.10., 壽座)·<무사적 교육 武士的敎育>(1911.11., 御成座)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1910년대에 한국 연극인들이 신파극을 공연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일본극단들이 그들의 신파극을 가지고 상륙했으며 우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성구가 혁신단에서 창립 공연한 <불효천벌>은 수좌에서 공연한 <뱀의 집념>을 번안한 것이며, 후에 공연한 <불여귀>·<장한몽 長恨夢>(금색야차의 번안물)·<육혈포강도 六穴砲强盜>(피스톨강도 청수정길의 번안물)·<무사적 교육> 역시 그러한 작품들이었다.
그의 공연은 1910년 이전의 재경(在京) 일본 신파를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일인 거주지역인 남촌(南村)에서 배워서 한인 주거지역인 북촌(北村)으로 확대, 전파시킨 셈이다.
혁신단 초창기의 극장세(劇場稅)는 15원이었고, 관람료는 자리등급에 따라 10전·20전·30전이었으며 학생·소아·군인은 반액이었다. 배우에 대한 배당은 1등에 평균 80∼90전, 말석 배우로 4등 배당이 15∼16전 정도였는데, 당시 쌀 한 되 값은 15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배당액은 평균치를 지적한 것일 뿐, 1910년대 극단의 경기는 전반적으로 부진하였다. 당시 극단의 조직형태는 명배우·인기배우 중심의 체제(star system)이어서 배우들의 인기가 떨어지면 극단의 힘도 무력해지는 것이 상례였다.
혁신단의 뒤를 이어 윤백남(尹白南)·조일제(趙一齊)의 문수성(文秀星)과 이기세(李基世)의 유일단(唯一團)이 일어남으로써 본격적인 신파연극 시대를 맞게 되었다. 1911년 혁신단을 시초로 하여 1919년까지 약 10년 동안 부침(浮沈)하면서 공연활동을 벌인 신파극단은 대략 20여 개나 된다.
우선 1912년 발족한 극단은 앞서 언급한 것 이외에 혁신선미단(革新鮮美團, 대표 趙重章)·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 대표 朴昌漢)·이화단(以和團, 대표 金正元)·조선풍속개량성미단(朝鮮風俗改良誠美團, 대표 조중장)·기성청년단(箕城靑年團)·영신단(英新團) 등 8개 단체이다.
1913년에는 지방에서 기화단(箕華團)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고, 1914년에는 정극단(正劇團, 대표 韓昌烈)이, 1916년에 가서 예성좌(藝星座, 대표 李基世)·수양단(首陽團) 등이 등장하게 된다. 1917년에는 개량단(改良團), 1918년에는 취성좌(聚星座, 대표 金小浪), 그리고 1919년에는 조선문예단(朝鮮文藝團, 대표 李基世)·신극좌(新劇座, 대표 金陶山) 등이 발족되었다.
이상 20여 개 극단에 관계한 연극인은 대략 100여 명 내외인데, 여러 가지 요인으로 극단이 유지되지 못해 수시로 이합집산(離合集散)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20여 개의 극단에서 1910년대에 공연한 작품의 수효는 100여 편이 넘는다. 기록에 남지 않은 공연까지 합치면 훨씬 상회할 것이다.
당시에 공연된 작품들의 주제를 중심으로 분류하면, 효도 권장·신교육 권장·미신 타파·계급 타파·적서차별 타파·충의 권장·배금주의 타파와 사랑과 복수, 고부간의 갈등, 자유결혼의 문제, 선악의 갈등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이 중에 선악의 갈등을 다룬 것이 많다. 한마디로 1910년대의 신파극은 일본 신파의 아류적인 요소가 많이 담긴 오락극이었다.
1920년대에 이르면 신파극단들은 종래의 상투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고자 몇 가지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작품을 번안, 각색하던 것에서 벗어나 차츰 당대의 현실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대치하였고 무대장치·분장·연기방식도 한국적인 방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작품의 내용이 점차 식민지 상황을 소재로 삼자 일제의 연극에 대한 통제와 단속도 한층 강화되었다.
1920년대에 활약한 신파극단에는 1920년의 조선문예단(朝鮮文藝團, 대표 李基世), 1921년의 예술협회(藝術協會, 대표 李基世), 1922년의 민중극단(民衆劇團, 대표 尹白南), 1926년의 조선극우회(朝鮮劇友會)·민립극단(民立劇團, 대표 卞基鍾), 1927년의 산유화회(山有花會), 1928년의 화조회(火鳥會), 1929년의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 대표 金小浪), 1918년에 창단되어 활동을 계속했던 취성좌 등이 있었다.
이 밖에 극문회(劇文會, 서울)·무대예술연구회(舞臺藝術硏究會, 서울)·백조회(白鳥會, 서울)·예화극회(藝華劇會, 서울)·예림회(藝林會, 함흥)·신극운동사(新劇運動社, 부산)·자우회(自羽會, 동래)·무대협회(舞臺協會, 대구)·신극협회(新劇協會, 진남포)·동정우회(同正友會, 회령) 등이 활약하였다.
1920년대의 신파극은 1910년대와 구별하여 개량신파(改良新派)라 부르기도 한다. 1910년대의 일본의 아류적인 신파에 비하면 일말의 새로운 방식이 가미된 연극이기는 하였으나 본질적으로 상업주의나 멜로드라마적인 특색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초에 새로운 젊은 연극인들을 중심으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약칭 劇硏)가 결성되면서 연극사적으로는 신파극과 신극(근대극)이 확연히 구별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신극운동은 1920년대 초에 동경유학생들이나 토월회를 중심으로 틈틈이 이뤄지기는 했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분명해졌다.
그러면서도 신파극은 새로운 신극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폭넓게 받아들여 신파극 자체의 수정도 이루어졌다. 신파극은 신극에 대한 기성 연극의 구실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체의 발전과 사회적 확대를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1935년 11월에 개관한 동양극장의 무대를 통해서 한국 신파극은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철저한 상업주의에 입각한 완벽한 제작을 시도했고 일찍이 보기 어렵던 흥행도 성공했다. 그리하여 흔히 1930년대 후반의 신파극을 개량신파와 구별하여 고등신파(高等新派)라 부르기도 하였다.
동양극장에서는 상업주의에 성공하기 위해 전속극단인 청춘좌(靑春座)와 호화선(豪華船)을 두었고, 고액의 월급을 주면서 이른바 당대의 인기배우들을 기용하였다. 레퍼터리의 원활한 공급과 수준을 높이기 위해 박진(朴珍)·이서구(李瑞求)·이운방·송영(宋影)·임선규·김건·최상덕(崔象德, 일명 獨鵑)·김영수(金永壽) 등 전속 극작가도 두었다.
1930년대에 활약한 신파극단으로는 1929년대에 창단하여 활동을 계속한 조선연극사 이외에 태양극장(太陽劇場)·연극시장(演劇市場)·신무대(新舞臺)·협동신무대(協同新舞臺)·황금좌(黃金座)·문외극단(門外劇團)·명일극장(明日劇場)·봉황극단(鳳凰劇團)·예원좌(藝苑座)·연극호(演劇號)·청춘좌·동극좌(東劇座)·희극좌(喜劇座)·호화선·아랑(阿娘)·고협(高協)·신인무대(新人舞臺)·중앙무대(中央舞臺)·화랑원(花郎苑)·낭만좌(浪漫座)·협동예술좌(協同藝術座) 등이 있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연극통제는 더욱 획일화되었고 친일 연극운동이 전개되는데, 이상의 신파극단들은 대부분 그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종래의 신파극은 정치적인 선전과 목적을 위한 멜로드라마로 성격이 변질되었다.
대부분의 연극인들이 친일 연극운동에 가담하여 광복 이후 민족진영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서 신파극마저 자연히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리하여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더불어 크게 세력을 떨쳐 나가던 신파극은 다시 일제의 패망과 함께 점차 그 자취가 사라졌다.
오늘날 신파극 자체는 없어졌으나 신파극에서 생성된 신파조는 연극·영화·라디오드라마·코미디 등에 폭넓게 스며들어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고 있다.